누구도 아서플렉을 원하지 않는다
폴리아되를 보고 뭔가 기록해 두고 싶은 말이 길게 생겼는데 달리 공간이 없어 이곳에 남긴다
몇 년 전 배트맨의 영원한 아치애너미, 조커의 단독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히스레저의 서슬 퍼런 조커가 생생한데, 누가 감히 조커를 단독영화로 찍고 연기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돌이켜보니 잭 니콜슨의 조커도 대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나였으니 괜찮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영화가 개봉하고 나는 굉장히 양가적인 감정을 느꼈다
영화 자체의 엄청난 완성도에 감탄하면서도, 영화에 환호하는 팬들에는 공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이 사회의 냉소와 괴롭힘에 타락하는 플롯에 안타까움은 느낄지언정,
조커가 되어 폭발하는 시나리오에 후련하거나 상쾌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영화 조커는 아서플렉의 타락을 그린 비극이었다. 그저 남을 웃기고 싶었던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이 세상의 냉대와 부조리, 괴롭힘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타락해 스스로를 버리는 그런 비극이었다.
그리고 폴리아되를 보았다.
영화는 아서플렉이 리 퀸젤을 만나며 겪는 정신적 방황과, 그 끝에 하게 되는 선택을 그리고 있다.
아서는 누구도 자신을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조커로 거듭나 세상의 관심을 얻고, 사랑하는 리 퀸젤을 만났다.
그러나 그 모든 관심은 화장을 한 조커를 향한 것이며, 여전히 아서 플렉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공감하는 사람과 가장 깊은 사랑을 나누는 순간조차, 아서 플렉은 아서 플렉으로 사랑받지 못한다.
사랑받고 관심받기 위해, 아서플렉은 조커여야 했다.
아서로는 사랑받을 수 없기 때문에. 재판장에서 조커라면 하지 않을 어설픈 피스 사인을 날리는 아서는 그토록 애처롭다. 아서는 진정 자신과 조커가 하나이길 바라는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또 다른 면인 조커를 병 취급하는 변호사도 아서 플렉의 안식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결말에서 결국 '노래 부르기'를 멈추고 아서 플렉으로 돌아가기를 택한다.
세상의 삐뚤어진 관심과 사랑에서 도망쳐, 온전한 자신으로 소중한 사람과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당연한 듯 그의 사랑과 세상은 조커가 아닌 그를 외면한다.
아쉬운 부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영화 전반에 흐르는 환상적인 연기와 쫀쫀한 색감, 훌륭한 연출이 어우러진 영화였고, 감상 경험도 훌륭했다.
아서 플렉을 정형화된 사이코패스 살인마나, 배트맨이 있을 때만 완성될 수 있는 아치애너미 조커가 아닌, 아서 플렉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영화였다. 제목이 조커가 아니어도 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아서 플렉이 타락한 자신을 지칭하는 용어가 부쳐였건, 슬라이서였건, 조커였건 상관없는 그런 영화였다.)
그리고, 10점 만점에 8점쯤 줄 수 있겠다 했던 이 영화는, 관람 후의 경험을 통해 9.5점짜리 영화가 되었다
아서플렉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영화 속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유튜버, 평론가, 관객들은 전편에서 타락한 조커의 폭발과 광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어떤 이는 전작에 대한 존중이 없다고, 어떤 이는 이건 조커가 아니라고, 어떤 이는 별로 진행되는 내용이 없다고, 영화를 좋지 않게 보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영화에서 조커가 하는 살인은 없다.
단 한 명도 죽이지 않는다.
누구를 다치게 하는 것도 없다.
아캄수용소와 재판장의 질서를 좀 어지럽히는 것 말고는 어떤 잘못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치 극 중 인물들처럼, 현실의 많은 사람들도 그런 아서 플렉을 원하지 않는다.
관객도, 평론가도 사람을 죽이지 않고, 조커를 버리는 아서 플렉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이상하게도 너무 슬펐고, 반대로 이 영화를 완성시키는 지점으로 느껴졌다.
이 영화는 대중의 비웃음과 외면으로 완성되는 영화로 느껴졌고 그런 집단적 비웃음과 외면이 비로소 폴리 아 되라고도 느껴졌다.
결국, 누구도 아서 플렉을 원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