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웹툰 뽕에 취해있을 때가 맞나?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끄적여본다.
예전 나는 만화책을 출판하는 회사에서 디지털 서비스를 담당했었다.
그때 했던 고민 중 가장 큰 것은 카탈로그의 역할을 할 매체가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과거에는 만화 잡지가 단행본의 카탈로그 역할을 했었다.
소년챔프나 아이큐점프를 사면, 슬램덩크 드래곤볼만 읽고 잡지를 버리지 않는다.
기왕 돈 주고 산 거니까, 나머지 흥미 없는 만화들도 한 번쯤 훑어보게 되고, 그러다 재미있는 만화를 발견해 독자가 된다는 소리다.
이게 만화의 카탈로그 역할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출판만화 시장이 망해가며, 만화잡지는 사라지고 만화의 카탈로그도 없어졌다.
그 상태로는 아무리 좋은 작품이 나와도 독자를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제안했었다. 과감하게 1권씩을 무료로 풀자고. 그걸 본 사람들이 2권부터 사서 보게 하자고.
당시는 웹툰이 지금처럼 대세가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 단행본을 초반 무료로 풀었을 때 후반 매출이 가파르게 상승한다는 통계 증거도 있었다.
그러나 해당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단행본의 오프라인 매출에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네이버 웹툰이 만화 플랫폼의 대명사가 된 뒤에는, 제법 카탈로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였다.
마음의 소리를 보러 네이버 웹툰에 들어왔다가 다른 수요웹툰을 보는 식이다.
그런데 요즘은 다시 그 규칙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우선 만화의 수가 너무 많아졌다. 8화 완결 드라마는 쉽게 손댈 수 있지만 시즌당 23화씩 총 11 시즌쯤 존재하는 드라마는 손대기 어려운 것 과 같다. 들어온 김에 관심 없던 만화도 훑어보기에는 제공하는 작품의 수가 너무 많다. 일본의 소년점프는 1주에 약 25 작품 안팎을 연재한다. 아래는 네이버웹툰의 요일별 보기를 캡처한 이미지이다. 스크롤을 내리면서 심심한 사람은 숫자를 세어보자.
독창성이나 작품 자체의 매력도 많이 약해졌다. 웹툰은 편집부의 역할을 대부분 검열에만 할애할 뿐, 작품을 같이 만들어나간다는 느낌은 적은 편인데 그 폐해가 아닌가 싶다. 최근의 트렌드인 회귀물, 무협물, 회귀 무협물, 이 세계 전생 등 인기 있는 주제의 만화라면 틀을 무시하고 비슷한 주제의 작품이 여러 개씩 동시에 연재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는 플랫폼이 그저 콘텐츠 장터가 될 뿐 자체적인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소년점프는 우정 노력 승리라는 색이 있는 잡지였다. 실리는 만화의 틀도 제법 명확해서, 드래곤볼이 인기를 끈다고 드래곤볼 비슷한 만화를 마구 양산해서 연재할 수 있는 구조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기를 쌓고, 질을 높이고, 원나블을 만들 수 있었다고 본다.
웹툰 플랫폼은 지금이라도 별도의 선별 기준을 가지고 작품을 추천할 수 있는 구도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인기 있는 주제로 무조건 채워 넣는 방식은 플랫폼의 차별화를 없앤다. 왜 여기서 봐야 하는가? 왜 이걸 선택해야 하는가. 수백 개의 작품 중에 제목에 혹해 시간 때우기로 만화를 소비하는 패턴만 고착화되어서는 만화사업의 성장에 한계가 올 수 있다.
모든 만화가 예술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화는 영화나 활자 책, 음악이나 연극과 같은 매체가 그렇듯, 오락일 수도 교육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화라는 장르는 다른 매체처럼 예술로 평가받아야 생명력을 부여받을 수 있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무리가 있다.
기존의 매출구조를 깨지 않고, 위클리 네웹 같은 페이지를 추가로 만들어서 주 1회 연재되는 작품들을 엄선해 정해진 수량만 제공할 수는 없을까? 그 페이지에 선별된 만화들은 인기순도, 매출순도 아니고 네이버 웹툰의 편집자들이 지금 시점에 필요하고, 시장에서 흐름을 만들 수 있다고 믿어지는 작품들이어야 하겠고, 종종 실패하겠지만 그런 실험과 시도가 웹툰의 색을 바꾸고 질을 끌어올려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게 가벼워지는 세상이다. 진지하면 선비질이고, 감성적이면 오그라든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예술로 남는 작품은 나온다. 선비질에 오그라들더라도. 그리고 플랫폼은 그런 작품의 생명력에 기대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