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주는 경험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중박 혼용)의 기세가 대단하다.
방문객 수는 아시아 1위, 세계 6~8위에 해당하고, 관련 상품 매출은 작년 115억을 달성했으며, SNS에서도 다양한 층위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2030을 끌어들이는 박물관의 비밀
“주말엔 박물관 가서 놉니다”... MZ 놀이터 된 국중박
“유물도 힙할 수 있죠” SNS 도배한 ‘박물관 굿즈’의 탄생
박물관은 젊은 세대에게 인기를 끌기 어려운 공간이다.
조용하고, 따분하고, 지루하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은 어쩌다 이런 인기를 얻게 되었을까? 국중박이 주는 어떤 경험이 젊은 세대를 포함한 많은 사람을 사로잡은 걸까?
국립중앙박물관이 어떤 경험을 제공하기에 이런 인기를 끌고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국중박의 이런 변화는 대략 2020년, 2021년 정도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의 관장 인터뷰를 보면, 외연을 넓히고 조직을 확대하는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에 더 충실할 때라는 각오를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까지는 외연을 넓히고 조직을 확대하는 하드웨어에 집중했다면 이제 소프트웨어인 본연의 업무에 더 충실할 때”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서 소장품의 가치를 높이고 품격 있는 전시를 통해 국민들에겐 문화적 자긍심을, 외국인들에겐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싶다. 관람객 한 분 한 분의 영혼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박물관의 하드웨어는 건물이나 부지, 관리 인력 등을 말할 것이다.
그럼 박물관장이 본연의 업무라 말하는 소프트웨어란 무엇일까?
다른 인터뷰에서 관장은 관람객의 영혼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들겠다고 한다. 전시된 유물 그 자체가 가진 매력이나 건물이 주는 경험(하드웨어)에 기대지 않고 관람객의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려면, 전시 기획이나 설명, 안내를 통한 지적 확장과 전시 방법을 포함한 관람 여정의 설계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의 극대화가 필요하다.
즉 국중박의 [소프트웨어]는 [영혼을 풍요롭게 만드는 관람여정]이라고 줄여도 무방하겠다.
국중박은 어떤 관람 여정을 만들고 있을까?
박물관 이용 여정의 핵심은 동선이고, 동선설계는 단순한 이동경로가 아니라 경험의 흐름을 설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최고의 게임 중 하나로 평가받는 닌텐도 ‘젤다의 전설 - 야생의 숨결’에서는 높은 구조물이나 빛나는 대상, 특이한 구조, 실질적 보상을 주는 구조물을 중심으로 사용자를 끌어들이는 ‘인력’을 설계해 플레이어의 자율적 이동을 유도했다. 사람들은 보여주는 것보다 발견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스스로 경로를 선택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국중박도 마찬가지다. 입장하면 국내에선 보기 드문 아주 높은 석탑(특이한 구조, 인력)을 발견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드문 대리석 석탑은 입구 근처에 있지 않고 멀리 배치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관람객의 이목을 끈다. 그런데 선사시대를 다룬 전시관은 입구 바로 근처에 있다. 거기서 선택이 발생한다. 선사시대부터 시간순으로 유물을 감상할 것인지, 멀리 있는 저 높은 탑 같은 것을 먼저 볼 것인지.
관람객의 유형이나 사전에 어디까지 계획하고 왔을지에 따라 분기가 발생하고, 이동이 발생하며, 이동 중에 새로운 발견이 다시 생기는 형태의 경험이 만들어진다.
다수의 방문 목적이 되었을 유명 상설 전시 ‘사유의 방’은 1층이 아닌 상층에 있어 관람객이 유물을 찾아가게 유도한다. 이는 단순한 소비형 사진 명소가 되는 것을 막고, ‘찾아가는 과정’을 만들어 관람 경험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국중박의 관람 여정에는 곳곳에 이런 발견과 분기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여정이나 아래 설명할 요소들을 국중박이 100% 의도했다는 것은 아니다. 하드웨어의 한계나 전시 유물의 숫자 등을 고려해 보면 그렇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관람 내내, 뭔가를 발견하게 하려고 노력한 부분들이 보였고, 그런 노력과 약간의 행운이 이런 여정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박물관의 전시유물 안내는, 관람 경험의 매우 중요한 축이다. 유물의 이해도가 관람 경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데, 사람마다 관심도가 다르기 때문에 구성도 쉽지 않다.
유물에 바로 돌진하는 사람, 설명을 읽는 사람, 사전에 공부를 하고 오는 사람, 어려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인이나 어린이까지. 사람들의 각기 다른 행동에 맞는 안내가 필요하다.
국중박은 다양한 안내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어떤 안내는 텍스트 중심의 일반적 형태고, 어떤 것은 영상으로 어린이들의 이해를 돕는다. 어떤 것은 인터랙션이 들어가 직접 체험해 보는 형태로 유물의 이해를 높일 수 있다. 전문적인 것부터 가벼운 것까지, 관람객은 자신의 이해도와 취향에 따라 필요한 안내를 골라 소비할 수 있게 된다.
박물관 하면 떠오르는 전시 방법은 벽장 안 유리관 속에 유물을 모셔두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유물은 사방에서 둘러볼 수 있을 때 그 가치가 커진다. 조각품이나 왕관 같은 것이 그럴 것이다. 국중박은 입체적 조형이나 기술을 확인할 때 더 좋은 경험을 만들 수 있는 이런 유물은 방의 중심에 전시하고 있다. 이 구조가 방을 回 자 모양으로 만들고 관람 순서의 분기를 만든다.
어떤 유물은 한 면에서 보아도 전반적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무기류, 비석의 탁본, 서책과 같은 것들이 그럴 것이다. 이런 유물들은 주로 벽면을 따라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서책 중에서도 가치를 제고할 수 있는 것들은 특별한 방식의 체험형 전시를 제공한다.
입체적인 유물이지만, 단품보다 발전상을 볼 때 의미가 있는 유물들은 가능한 여럿을 모아 전체상을 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유물 자체가 원래 있던 공간과 비슷한 체험이 유물의 가치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것들은 별도의 전시 공간을 설계했다. 고분 벽화나, 조선시대 사용되었던 가구, 일본의 다실 등의 유물이 그런 전시 방식을 택했다.
많은 전시가 모조품을 직접 만져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유리관 너머의 유물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구성한 것이다.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는 거울이나 종, 책과 같은 것들은 관람 경험을 새롭게 만든다
이런 유물 특성에 맞춘 전시 방식은 관람 경험을 특별하게 만든다. 루브르의 모나리자는 전 세계인이 관심을 가지는 작품이지만, 전시는 특별하다 말하기 어렵다. 그냥 다른 그림들과 함께 벽에 걸려있으니까. 국중박의 유물이 가진 가치가 모두 모나리자정도의 가치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중박은 소프트웨어로 유물의 가치를 끌어올리고, 관람 경험을 극대화시키려 하고 있다.
파인다이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메인 요리와 디저트이다. 사람은 경험의 모든 과정을 기억하기 힘들어하고, 가장 특이했던 경험이나, 끝 경험을 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국중박에도 이런 피크를 담당하는 전시가 안배되어 있다. 그 유명한 사유의 방이다. 현재 국중박 관람경험을 상징하는 전시이니만큼 조금 자세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사유의 방은 반가사유상이 가진 근원적 가치, 사유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는 전시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만든 사람들도 관람객이 10명 이하일 때 관람하는 것을 추천할 만큼 고요하고 한적한 환경에서 ‘사유’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관람 경험을 중심으로 설계한 것이다.
사유의 방은 접근 경로부터 신경을 썼다. 입장 통로의 조도를 낮춰 눈의 적응을 만들고, 낮은 조도의 관람 환경에서도 유물을 잘 볼 수 있게 고려했다.
좌) 입구에서 유물이 아니라 관람에서 얻었으면 하는 경험을 소개하고 있다. ‘사유’의 의미.
우) 전시공간으로 통하는 복도는 어두워서 눈의 적응을 돕는다. 전시공간의 낮은 조도에서 유물을 잘 보이게 하기 위한 배려.
관람 공간에 들어서면, 유물을 살짝 올려다볼 수 있는 구조로 전시공간의 기울기를 조절해 집중을 돕는 한편, 유물 쪽 천장의 높이를 낮춰 원근감을 왜곡해 유물이 더 거대해 보이도록 한다. 들어가자마자 유물에 집중하게 되고(발견), 유물까지 이동하게 되는 구조이다. 전시 공간의 벽면은 황토 재질에 계피를 섞어 전통적인 향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해 공간의 이질감을 줄이고 몰입을 지원하도록 설계되었다.
이 특별 전시공간은 대략 25m 정도의 길이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작자에 따르면 연극무대와 비슷한 느낌을 주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한다. 그렇게 이동하며 다가간 반가사유상 두 점은 각기 나란하지 않고 살짝 다른 곳을 바라보게 전시되어 있다. 그래서 관람객은 각 불상을 정면에서 관람하기 위해 위치의 이동을 경험하게 된다.
이 전시는 반가사유상의 뒷모습을 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반가사유상의 뒷면은 책이나 영상에서 보기 힘들었던 부분이지만, 그 자체의 놀라움보다도 관람 경험을 강조하기 위한 배려가 있다. 국중박은 전시 기울기를 통해, 반가사유상 뒤에서 유물을 바라볼 때 유물 너머의 관람객들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다. 설계자는 부처와 부처를 만난 대중을 한 프레임에 담아 관람할 수 있는 경험을 만들고자 했다고 한다.
이런 세세한 배려가 유리관 속 수많은 다른 유물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의 킥(피크)을 만들고,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것을 돕는다.
이런 피크경험을 유도하는 공간은 사유의 방 이외에도 존재한다. 손기정 옹의 투구 역시 비슷하게 단일 유물에 집중하는 공간의 웅장함을 표현했다. 이런 전시방법은 자칫 ‘공간적 비효율'로 보일 수 있지만, 관람 경험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국중박의 성공을 조명하는 관점에서, 기념품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좋은 관람 경험을 마친 사람들은 이 긍정적 경험을 오래 기억하거나 향유하고 싶어 한다. 그 시점에 눈길을 끄는 것이 유물을 자체 ip로 활용한 기념 굿즈들이다.
국중박의 굿즈가 일반적인 박물관의 그것과 다른 점은, 유물을 ip로 삼아 만든 상품들을 판다는 것이다.
우리는 별 기능이 없는 인형이라도 유명 ip라면 높은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 국중박 굿즈는 바로 이런 점에서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관심이 생긴 반가사유상에 대한 유물이나, 사진으로 전시된 석굴암 유물, 눈으로 본 그림의 재미있는 부분을 잘라낸 술잔처럼 방금 관람하여 호감이 생긴 유물들이 ip로 활용된 상품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구매가 관람 경험을 길게 유지하도록 돕는다.
경험을 만드는 일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구글의 검색 경험, 토스의 금융 경험, 쿠팡의 쇼핑 경험처럼 경험의 동인이 되는 핵심가치다.
핵심 가치가 사용자에게 행동을 만들고 경험으로 남는다.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루브르에 방문해고, 그 경험이 기억으로 남는 것과 같다. 박물관의 핵심가치는 당연히 유물의 질과 양일 것이다.
그러나 공간과 동선을 고려한 여정 설계에 따라, 비슷한 가치의 유물로도 다른 경험을 만들 수 있다.
일부 기사나 언론은 국중박의 인기를 한류나 오래된 것에 흥미를 가지는 트렌드로 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는 마케팅 효과를 얻을 수 있을 뿐, 관람객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방문객의 마음에 긍정적 이미지가 남아있어야만 해석 가능한 관람 숫자를, 국중박은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국중박의 현재 인기는 다양한 경험을 고려한 설계를 기반으로, 발견이 있고, 선택할 수 있으며, 강하게 기억에 남는 긍정적 경험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경험은 화면 안에만 있지 않다.
경험은 사람이 서비스, 제품, 공간 등과 소통하는 모든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잘 설계된 경험은 국중박의 사례에서 처럼 서비스의 성공을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