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랩과 고젝의 적자 행진
동남아 스타트업 시장은 매력적입니다. 2021년 기준 아세안 시장의 인구는 약 6억 7천만 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9%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벤처 투자 금액도 한국의 2022년 약 6조 8천억 원 대비, 13조 원이 넘는 투자 규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때 각광을 받았던 동남아의 유니콘인 그랩과 고젝이 상장 시점 대비 현재 주가 흐름이 매우 저조합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상장 후에도 적자 행진이 계속되고 있어 흑자 실현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기반의 그랩과 자카르타 기반의 고투 그룹은 한때 동남아 스타트업 생태계의 상징이었습니다. 기업 가치도 10조 원을 넘어서며 동남아 시장에서도 데카콘 탄생이 가능함을 보여주었고, 전 세계 투자자들이 동남아 시장의 가능성에 대해 주목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랩은 동남아 시장에서 우버를 인수한 후, 2021년 12월 나스닥에 기업가치 370억 달러(약 49조 원)에 상장하면서 샴페인을 터트렸습니다. 한편, 고투 그룹은 2021년 5월 고젝과 토코피디아의 합병으로 탄생했고, 2022년 4월 약 300억 불(약 38조 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고 인도네시아 증권거래소에 상장했습니다.
그랩과 고젝은 동남아 슈퍼앱 전략의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각각 차량 공유로 사업을 시작한 이후, 음식 배달, 핀테크와 쇼핑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하나의 브랜드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그랩은 2012년 택시 호출 앱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음식 및 식료품 배달부터 금융, 결제, 쇼핑 예약과 결제, 보험, 대출 등 생활 전 분야로 서비스를 확장했습니다. 고젝 역시 오토바이 콜 서비스부터 마사지, 음식배달, 식료품 배달 및 결제 등 다양한 서비스로 진출했습니다. 두 개의 유니콘은 때로는 모방하며, 때로는 경쟁하며 동남아 시장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수익성입니다. 개선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매출 대비 적자가 큽니다. 23년 1분기 기준 영업손실률이 그랩은 -45%, 고투그룹은 -121%에 달하고 있습니다. 1분기 매출은 그랩과 고젝이 각각 5.2억 달러(약 6천8백억 원)와 3.3 조 IDR(약 3천억 원)를 기록한 반면, 영업손실은 각각 -2.5억 달러(약 3천3백억 원)와 -4 조 IDR(약 3천6백억 원)를 기록했습니다. 분기 단위로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2021년 영업적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규모였습니다.
그랩과 고젝의 높은 기업가치 이면에는 동남아 시장이 단일 경제권역으로서 작동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종교, 인종 및 정치 체제를 지닌 11개국이 지리적 인접성을 가질 뿐, 그랩과 고젝은 범 동남아 시장에서 시너지 창출이 가능함을 아직 증명해내지는 못했습니다. 2022년 기준, 그랩은 여전히 매출의 약 60%를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벌어들이고 있고, 고투는 100% 가까이가 인도네시아 매출입니다. 지난 10여 년간 그랩과 고젝은 나름대로 지역 확장을 공격적으로 시도했으나, 서로 다른 규제와 노동환경, 국가별 조직원들의 관리 방식 등의 상이함으로 그랩은 반쪽짜리 성공에 가까우며, 고젝은 결국 글로벌 확장을 포기하고 인도네시아 시장에 정착하는 것으로 사업 방향을 수정했습니다.
그랩과 고젝의 개선되지 않은 적자는 주가에도 반영되고 있습니다. 2023년 5월 기준 현재 주가는 상장 당시 주가 대비 25%~30% 사이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랩과 고젝의 기업가치는 각각 약 14조 원, 11조 원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분명 2022년 1분기 대비해서는 괄목할만한 수익성 개선을 이루고 있기는 하나, 영업손실률이 커서 투자자 시각에서는 여전히 의구심이 큰 상황입니다.
그랩은 2023년 1분기 실적을 발표하며, 상당한 수준의 수익성 개선과 중요한 지표들이 고성장세로 돌아서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매출 성장세가 탄탄하고, 특히 공헌이익이 흑자로 전환되어 회사의 내실이 탄탄해지고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랩 주가가 실적 발표 직후 10% 넘게 급락한 것을 보면, 시장을 설득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입니다.
경기침체 국면에서 시장 잠재력은 먼 미래의 얘기일 뿐, 지금은 당장의 수익성이 훨씬 중요한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