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총선에서 파란을 일으킨 진보 정당의 꿈
태국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국왕에 대한 비판, 징병제 의무 회피, 그리고 동성 결혼입니다. 입헌 군주제 하에서 국왕에 대한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고, 강한 처벌이 존재합니다. 제비 뽑기를 하지 않고 입대하면 2년 중 6개월을 줄여주나 징병제는 20대 남성들의 부담입니다. 동성 결혼 합법화 법안은 2022년 6월 의회에 넘겨졌으나 계류 중입니다.
지난 5월 14일, 세 가지 법안 개혁을 공약으로 내세운 무브 포워드당(MFP)이 제1당으로 부상했습니다. 무브포워드당(MFP)은 5월 열린 태국 총선에서 하원 500개 중 151석을 확보했습니다. 방콕의 33개 지역구 중 32개 지역구를 싹쓸이하면서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번 총선 결과는 지난 20여 년간 태국 정치를 지배해 온 ‘탁신파 vs. 군부파’의 구도를 깨트렸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탁신의 막내딸이 이끄는 푸아타이당(For the THAI)은 141석으로 2위에 그쳤습니다. 2000년 이후 총선에서 항상 1당 자리를 차지했던지라 이변이 생긴 셈입니다. 군부 정당들은 77석에 그치면서 참패했습니다.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쁘라윳 짠오차(69) 총리가 이끄는 루엄타이쌍찻당(UTN)과 쁘라윳 웡수완(78) 부총리가 이끄는 빨랑쁘라차랏당(PPRP)가 참패하면서 현 군부 총리에 대한 명백한 정치 심판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선거의 관건은 빈부 격차를 겨냥한 포퓰리즘이 여전히 대세가 될 것인지, MZ 세대가 공감할만한 실질적 개혁이 더 우세할 것인지였습니다. 코로나 시국에 현 군부 정치권의 대응이 미흡해 군부 정권이 참패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탁신계 푸어타이당은 북부 치앙마이 농민을 기반으로 지난 20년간 한결같은 포퓰리즘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서민층을 위한 대출 지원이나 농업보조금이 대표적인 공약입니다. 반면 무브포워드당은 방콕의 젊은 엘리트층을 대상으로 군주제개혁, 징병제개혁, 동성결혼허용 등 피부와 와닿는 공약을 제시했고, SNS상에서 MZ 세대의 절대적 지지를 얻으며 총선에서 압승했습니다.
무브포워드당을 이끄는 1980년생 피타 림짜른랏 대표의 인기도 결정적이었습니다. 태국 명문 탐마삿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와 MIT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정치 명문가 출신이기도 합니다. 할아버지는 탁신 친나왓의 개인 비서와 하원 의원직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정부에서 농업 관련 고문직을 역임했습니다. 준수한 외모와 엘리트 교육을 받은 정치 명문가 출신이라는 점이 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습니다. 2008년 태국 미디어 매체지인 MThai에서는 피타 림짜른랏을 올해의 독신남으로 뽑기도 했습니다.
2023년 5월 선거 결과는 개혁적이었지만 아직 앞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가장 먼저 피타 대표의 총선 출마 자격 요건이 검증받아야 합니다. 군부 진영 팔랑쁘라차랏당(PPRP) 측은 언론사 사주나 주주의 공직 출마를 금지한 헌법에 따라 피타 대표의 출마 자격이 없다고 선관위에 문제 제기를 한 바 있습니다. 피타 대표는 태국 미디어업체 iTV 주식 4만 2천 주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관위가 어떤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 피타 대표가 총리가 될 자격이 있을지 결정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야권 연정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2017년 개정 헌법에 따라 총리 선출에는 하원 의원 500명 외에 군부가 임명한 상원의원 250명이 참여합니다.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과반인 376석 이상이 필요합니다. 총선 직후, 무브포워드당은 6개 야권 정당 연정을 통해 309석을 확보하겠다고 했으나 여전히 67석이 모자랍니다. 연정을 하겠다고 한 정당들도 각기 다른 셈법이라 연정 자체가 가능할지도 지켜봐야 하는 대목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또 다른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입니다. 태국은 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 후 22차례의 군사쿠데타를 시도했고, 9차례는 실패했으나 13차례 성공했습니다. 단순 계산으로 4년에 한 번씩 쿠데타가 발생한 셈입니다. 현 군부 세력들은 쿠데타가 없을 거라 장담하지만 과거에도 늘 그래왔던 터라 그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는 모양새입니다. 다만 이번 선거는 젊은 세대가 군부 쿠데타 세력에게 정치적 사망 선고를 내린 결과이기에 또 한 번의 군부 쿠데타 발생 시 후폭풍은 매우 거셀 것으로 보입니다. 2020년 ‘세 손가락 시위’로 거세어진 민주화의 열망이 이번 총선으로 이어졌고 1946년 이래 가장 높은 투표율인 85%를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태국 정당들의 합종연횡과 이합집산을 거쳐 7월 즈음 총리가 결정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번 총선에서 파란을 일으킨 피타 대표가 총리가 될 것이라는 예측은 강하지 않습니다. 태국 국민의 민주화 열망이 또다시 좌절될 수도 있다는 암울한 전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사진 출처: TheThai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