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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영로스팅 Dec 17. 2024

제9의 예술, 프랑스 정부의 지원

프랑스 정부는 만화를 단순한 대중문화가 아닌 국가적 자산으로 인식하며, 체계적인 보존과 지원 정책을 통해 이를 육성하고 있습니다. 1976년부터 만화를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법적 보존 의무를 부과한 것은 이러한 노력의 시작이었습니다. 디지털화 프로젝트와 연구 지원을 통해 대중과 연구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며, 만화의 예술적 가치를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만화의 해'와 같은 국가 차원의 캠페인은 만화가와 출판사들에게 직접적인 지원을 제공하며 산업 성장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들은 프랑스를 세계적인 만화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주요 요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만화 보존 정책은 단순한 자료 수집을 넘어, 문화유산의 가치를 인정하고 예술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역사를 보여줍니다. 1976년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이 시행한 만화 의무 소장 정책은 만화를 문화유산으로 공식 인정하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정책은 1537년 프랑수아 1세의 납본법 정신을 계승하며, 만화를 국가 자산으로 보존하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만화가 고문서나 미술 작품과 동일한 보존 및 관리 체계를 적용받게 된 것은 만화의 문화적 가치를 공고히 하는 중요한 성과로 평가됩니다. 현재 14만 권 이상의 방대한 컬렉션은 프랑스가 만화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상징하며, 이는 만화 창작자들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줍니다.


디지털화는 만화 보존과 접근성을 혁신적으로 향상시키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1997년 시작된 갈리카(Gallica) 프로젝트는 만화를 디지털화하여 보존과 접근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8만 개가 넘는 이미지와 자료의 디지털화는 희귀본과 절판된 작품을 대중과 연구자에게 새롭게 소개하며, 과거의 작품들이 다시 주목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디지털화 노력은 창작자들에게 과거의 작품을 연구하고 영감을 얻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만화 작품을 접할 수 있게 함으로써 만화의 문화적 영향력을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이 같은 정책들은 만화를 단순한 오락이 아닌 진지한 예술 형식으로 재정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국가 차원의 보존과 관리는 만화의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만화가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만화 연구의 학문적 기반을 마련하고, 만화학과 같은 새로운 학문 분야의 발전을 촉진했습니다. 이로 인해 창작자들은 자신의 작품이 미래 세대에도 전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더욱 열정적으로 창작에 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만화 보존 정책은 만화 문화의 발전과 다양성 증진에 크게 기여하며, 세계 만화계의 모범 사례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BnF) Gallica, 출처: 구글플레이 스토어




프랑스 앙굴렘에 위치한 '국제만화이미지시티(La Cité internationale de la bande dessinée et de l'image)'는 만화를 예술적, 문화적 자산으로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독창적인 복합 문화 공간입니다. 1990년에 설립된 이 기관은 박물관, 전문 도서관, 연구 센터 등 다양한 시설을 통해 만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보존하는 환경을 제공합니다. 만화를 단순한 대중문화가 아닌 진지한 예술 형식으로 격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매년 약 20만 명의 방문객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만화를 '제9의 예술'로 인정하는 프랑스의 문화적 전통을 구체화하며, 만화의 예술성과 사회적 가치를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국제만화이미지시티'의 중심에는 유럽 최대 규모의 만화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18,000점 이상의 원화와 25만 권 이상의 만화책을 소장하여 만화 예술의 역사와 진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박물관의 전시는 단순히 작품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만화의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영향을 조명하며 관람객들에게 깊이 있는 이해를 돕습니다. 이를 통해 방문객은 만화를 통해 시대의 변화와 사회적 흐름을 읽어낼 수 있으며, 만화의 예술적 가치와 문화적 중요성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대중과 연구자 모두에게 풍부한 학습 기회를 제공하며, 만화의 지평을 넓히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가의 집(La Maison des auteurs)'은 '국제만화이미지시티'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만화 창작의 미래를 열어가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애니메이션 감독들에게 창작 공간과 주거 지원을 제공하여 경제적 부담 없이 창작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합니다. 매년 수십 명의 작가들이 이곳에서 활동하며, 이는 새로운 재능의 발굴과 독창적인 만화 작품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작가들 간의 교류와 협업을 장려함으로써 다양한 스타일과 주제를 아우르는 혁신적인 작품들이 창작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프랑스 만화 산업의 지속적인 발전과 국제적 경쟁력 강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집, 출처: https://www.citebd.org/venir-a-la-cite/la-maison-des-auteurs




프랑스 만화계를 뒤흔든 라신 보고서는 2020년 1월, 극적인 상황 속에서 발표되었습니다. 프랑스 문화부 장관 프랑크 리스터(Franck Riester)는 지난 30년 동안 창작 활동의 변화를 조사하고, 예술가와 작가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도록 브루노 라신(Bruno Racine)에게 특별 임무를 맡겼습니다. 브루노 라신은 1951년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고위 공무원이자 작가입니다. 그는 프랑스 고등행정학교를 졸업한 뒤 퐁피두 센터 회장과 프랑스 국립도서관장을 역임하며 이 조사의 적임자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러나 보고서 발표가 지연되면서 생존 위기에 놓인 만화가들이 2020년 1월,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 보이콧을 선언하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이 사태는 프랑스 문화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많은 논란 속에서 정부는 서둘러 보고서를 완성하도록 압박했습니다. 결국 141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라신 보고서'가 마침내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이 보고서의 공개는 프랑스 만화계의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적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라신 보고서는 프랑스 만화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프랑스 만화가의 53%가 빈곤선 이하의 삶을 살고 있었고, 36%는 정부 지원금에 의존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여성 만화가의 수입은 남성의 절반 수준에 불과해 성별에 따른 소득 격차가 심각했습니다. 보고서는 만화 시장의 양극화 문제도 강조했는데, 상위 1%의 만화가가 전체 수익의 20%를 차지하는 반면, 하위 50%는 전체 수익의 10%에도 못 미쳤습니다. 신인 작가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여, 데뷔 후 5년 내에 절반 이상이 만화가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라신은 이를 두고 "문화 산업의 중세화"라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보고서는 프랑스 만화 산업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정부는 만화가들에게 '예술가'로서의 법적 지위를 부여하며 연금과 의료보험 혜택을 보장했습니다. 출판계에서는 판매량과 수익을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규정하는 등 투명성이 강화되었습니다. 디지털 판매에 대한 인세 기준도 새롭게 정립되었으며, 이는 작가들의 수익을 보다 공정하게 배분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앙굴렘 페스티벌 역시 변화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작가들에게 사인회와 강연에 대한 정당한 출연료를 지급하고, 숙박과 교통비를 지원하며 작가들의 참여를 보다 체계적으로 보장했습니다.


라신 보고서는 프랑스 만화가들의 권익 향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프랑스 예술가와 작가들의 열악한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제시된 23가지 권고사항은 '문화 노동'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예술가들의 노동 시간이 적절히 보상받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프랑스 사회가 예술과 문화 창작을 하나의 중요한 노동으로 인식하게 하는 데 기여했으며, 지속 가능한 창작 환경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브루노 라신, 출처: 위키피디아




2020년, 프랑스는 '만화의 해(BD 2020)'를 선포하며 만화를 '제9의 예술'로 공식 인정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이 캠페인은 만화를 단순한 대중문화가 아닌 중요한 예술 형식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프랑스 문화부는 만화가들에게 '예술가 지위'를 부여하여 의료보험과 연금 혜택을 포함한 사회보장 제도를 제공하며,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경제적 안정성을 보장했습니다. 또한, 출판사에는 세제 혜택을 제공해 재정적 부담을 줄이고 더 많은 작품 제작과 신진 작가 발굴을 지원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프랑스 정부가 만화를 국가적 문화유산으로 존중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 같은 지원 정책은 프랑스 만화 시장의 급격한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2021년 프랑스 만화 시장 규모는 약 50% 이상 증가하여 9억 유로에 도달했으며, 이 중 일본 망가의 폭발적인 인기가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전체 만화 판매량의 40% 이상을 차지한 망가는 새로운 독자층을 유입시키며 프랑스 서점에서 전체 책 판매량의 약 25%를 차지하는 핵심 카테고리로 부상했습니다. 이러한 성장세는 단순히 시장 규모 확대에 그치지 않고, 만화를 대중문화와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독창적 매체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정부와 문화 기관은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을 통해 만화의 대중적·학문적 위상을 높이고자 노력했습니다. 2020년 한 해 동안 전국적으로 700개 이상의 만화 관련 행사가 개최되었으며, 이를 통해 지역과 국제적으로 만화 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창작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독자들에게는 만화를 새로운 시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만화의 해'는 프랑스에서 만화를 단순한 오락물이 아닌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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