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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영로스팅 Dec 16. 2024

제9의 예술이 점령한 도시, 앙굴렘

파리 몽파르나스역에서 출발한 TGV는 프랑스의 그림 같은 전원을 가로지르며 경쾌하게 달립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마치 인상주의 화가의 캔버스처럼 다채롭습니다. 푸른 초원과 끝없이 이어진 포도밭, 중세의 성당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며 한 폭의 파노라마를 그려냅니다. 2시간 20분의 여정이 끝날 무렵, 기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앙굴렘에 도착합니다. 역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마치 만화책 속 세상에 들어온 듯한 독특한 감각이 사로잡습니다.


앙굴렘역은 그 자체로 거대한 만화 예술의 전시장입니다. 역사 벽면에는 생생한 만화 벽화가 그려져 있고, 플랫폼 곳곳에는 익숙한 만화 캐릭터 조각상이 자리해 여행객들을 환영합니다. '에르제 거리', '고시니 거리'와 같은 거리 이름들은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만화 문화의 중심지임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인구 4만의 이 작은 도시는 매년 1월, 전 세계에서 몰려든 20만 명 이상의 만화 팬들로 활기를 띱니다. 이는 앙굴렘이 가진 특별함을 여실히 증명합니다.


1974년에 시작된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은 이제 세계 최대 규모의 만화 축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루브르가 회화의 성지라면, 앙굴렘은 명실상부한 만화의 메카라 할 수 있습니다. 축제 기간 동안 앙굴렘은 도시 전체가 거대한 만화책으로 변모하며, 세계 각국의 만화가와 팬들이 모여 작품을 선보이고, 만화의 현재와 미래를 논합니다. 이곳의 거리들을 거닐다 보면 어느새 만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앙굴렘에서는 만화가 단순한 오락거리를 넘어, 살아 숨 쉬는 예술이자 문화의 중요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음을 생생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앙굴렘, 출처: https://www.angouleme-tourisme.com/




1970년대 초, 앙굴렘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특별한 산업 기반이 없던 이 작은 소도시는 포도 작황이 좋지 않아 와인 생산량도 감소하며 경제적으로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앙굴렘 시의원이었던 프랑시스 그루(Francis Groux)의 역할은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는 만화와 그래픽 노블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1971년 시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후 1972년에는 '천만 개의 영상(Les Dix Millions d'Images)'이라는 2주간의 만화 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전시회는 만화가, 출판업자, 서점업자, 그리고 독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앙굴렘이 문화 도시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프랑스 만화계는 급격한 변화와 발전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전까지 주로 어린이들의 오락거리로 여겨졌던 만화는 점차 모든 연령층이 즐길 수 있는 매체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필로트(Pilote)', '메탈 위를랑(Métal Hurlant)'과 같은 성인 대상 만화 잡지들이 인기를 얻으며, 만화의 주제와 표현 방식이 다양해졌습니다. 《아스테릭스》, 《발레리안과 로렐린》 같은 작품들이 큰 성공을 거두며 상업적 가치를 증명한 한편, 장-클로드 포레스트와 뫼비우스(장 지로) 같은 작가들은 실험적이고 예술성 높은 작품으로 만화의 가능성을 확장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만화가 '제9의 예술'로 인정받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지식인과 비평가들은 만화의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재평가하기 시작했고, 이는 만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1971년 파리 국립 장식미술학교에서 만화 관련 수업이 처음 개설되었으며, 1974년에는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이 시작되어 만화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프랑스 정부 역시 만화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1976년부터 만화 작가들에게 문화부 지원금을 지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만화는 건축, 조각, 회화, 음악, 문학, 무용, 영화, 텔레비전과 함께 '제9의 예술'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1972년 성공적인 전시회 이후, 프랑시스 그루는 이탈리아의 '루카 만화축제(Lucca Comics & Games)'를 모델로 한 행사를 앙굴렘에서 개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결과, 1974년 제1회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이 탄생했습니다. 이 축제는 앙굴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며 도시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970년대 프랑스에서는 만화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며 모든 연령층에서 만화를 즐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축제의 성장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현재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은 매년 약 4천만 달러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며, 앙굴렘을 세계 최대 규모의 만화 축제를 개최하는 도시로 발전시켰습니다.


1회 앙굴렘 행사 포스터 (1974), 출처: http://www.nrblog.fr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은 단순한 전시회를 넘어 만화의 모든 면모를 아우르는 생생한 축제의 장입니다. 이 시기 동안 도시 전체가 만화의 세계로 변모하여, 신간 발표회, 작가와의 만남, 사인회, 강연, 워크숍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집니다. 그중에서도 '앙굴렘 그랑프리'는 단연 하이라이트입니다. 만화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이 상을 수상하는 것은 작가에게 평생 잊지 못할 영광으로 남습니다. 2024년 그랑프리의 주인공은 78세의 영국 작가 포지 시몬즈(Posy Simmonds)로, 그녀는 영국 작가 최초이자 여성 작가로는 다섯 번째로 이 영예를 안았습니다. 시몬즈의 《제마 보베리(Gemma Bovery)》와 《타마라 드루(Tamara Drewe)》는 문학 작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그래픽 노블로, 예리한 사회 비평과 유머가 돋보이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페스티벌 기간 동안 앙굴렘은 더욱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만화의 도시로 변모합니다. 거리마다 만화 캐릭터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이 가득해, 마치 살아있는 만화책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카페와 레스토랑에서는 창의적인 만화 테마 메뉴를 선보이며, 일부 호텔은 객실을 만화 캐릭터 테마로 꾸며 투숙객들에게 잊지 못할 특별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몰입감 넘치는 환경 속에서 관람객들은 자신이 만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짜릿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은 단순히 만화를 감상하는 것을 넘어, 만화의 세계를 직접 체험하며 그 안에서 살아보는 독특한 기회를 제공하여 전 세계 만화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축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앙굴렘의 거리를 거닐다 보면, 마치 만화의 세계로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일부 주택의 집 번호는 만화 말풍선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만화 벽화 거리'에서는 건물 외벽에 그려진 유명 만화 캐릭터들의 대형 벽화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심지어 우체통 중 일부는 유명 만화 캐릭터 모양으로 디자인되어 있어, 평범한 일상의 순간조차 특별한 경험으로 탈바꿈시킵니다. 이러한 독창적인 도시 풍경은 만화와 현실의 경계를 허물며, 방문객들에게 잊지 못할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앙굴렘의 이러한 노력은 단순히 축제 기간에 그치지 않고, 연중 내내 '만화의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포지 시몬즈(Posy Simmonds), 《제마 보베리(Gemma Bovery)》,《타마라 드루(Tamara Drewe)》, 출처: 아마존




2024년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에서 한국 작가들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습니다. 마영신의 《엄마들》은 공식 경쟁 부문에 진출하며 한국 만화의 위상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이 작품은 50대 여성들의 일과 사랑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며 프랑스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습니다. 또한, 소피 다르크(Sophie Darcq)의 《한복》은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며 한국적 정서를 세계에 알렸고, 박윤선의 《놀라운 방씨 아가씨》는 아동 야수상을 거머쥐며 아동 부문 최고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다양한 장르와 주제를 탐구한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은 앙굴렘에서 큰 주목을 받으며, 한국 만화의 국제적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마영신의 《엄마들》은 프랑스 독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작품은 중년 여성들의 삶과 내면을 사실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담아내며, 기존 만화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던 주제를 과감히 탐구했습니다. 프랑스 언론은 "《엄마들》은 단순한 만화를 넘어 현대 사회를 비추는 거울 같은 작품"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소피 다르크의 《한복》은 프랑스 입양 한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 문화적 정체성과 뿌리를 찾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두 작품 모두 한국적 소재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달해 국제적인 공감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축제 기간 동안 앙굴렘 곳곳에서는 한국 작가들의 전시와 대담이 열려 관람객들의 발길을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박윤선의 《놀라운 방 씨 아가씨》는 독창적인 이야기 구성과 개성 넘치는 캐릭터로 프랑스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또한, 한국 만화를 조명하는 특별 전시관에서는 다양한 작품이 소개되며, 한국 만화의 예술성과 독창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번 축제의 성과는 한국 만화가 일본 망가와 차별화된 고유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앞으로도 한국 작가들이 국제무대에서 더 많은 활약을 펼칠 것을 기대하게 만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엄마들》, 《놀라운 방씨 아가씨》, 《한복》, 출처: Yes24, 아마존




프랑스 만화의 국제적 영향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2019년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일본의 거장 오토모 가쓰히로가 그랑프리를 수상한 사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수상은 프랑스가 자국 만화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계의 다양한 만화 예술을 인정하며 포용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프랑스 주요 만화 출판사들은 이러한 열린 태도를 기반으로 전 세계에 지사를 설립하며 글로벌 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프랑스 만화를 세계 무대에 올려놓는 동시에, 국제 만화 시장의 다양성을 풍부하게 만듭니다. 이제 프랑스 만화는 단순히 자국 문화의 일부를 넘어 세계 문화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만화의 위상이 변화하면서 교육 분야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2020년, 프랑스 교육부는 중학교 교과과정에 만화를 정식으로 포함시키는 획기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는 만화가 문학, 역사, 사회 등 다양한 과목을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데 유용한 교육 도구로 인정받은 결과였습니다. 같은 해,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만화학 박사 과정이 개설된 일은 만화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본격화되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만화가 단순한 오락거리를 넘어 심도 있는 연구와 교육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합니다. 프랑스의 선구적인 접근은 전 세계 교육계에 만화의 가치를 재조명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앙굴렘 국제만화축제는 만화 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선보이는 세계적인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 축제는 장르와 국경을 초월하며, 사회적 이슈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적극적으로 독려합니다. 또한 새로운 기술과 매체를 수용하는 열린 자세, 상업성과 예술성의 균형, 그리고 독자와의 직접적인 소통을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 만화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선 깊이 있는 예술 형식이자 강력한 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의 가능성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창작자들은 이 축제를 통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장하고, 세계적인 트렌드를 파악하며, 새로운 영감을 얻습니다. 앙굴렘 축제는 만화의 현재를 조망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중요한 장으로, 전 세계 만화 문화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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