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MC와 삼성전자의 딜레마
미국 정부가 2023년 2월 28일 공개한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의 지원 심사 기준이 과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2022년 8월 반도체 및 과학법에 서명하며 390억 달러, 우리 돈 51조 원 규모를 미국 반도체 생산에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공개한 세부 심사 기준에서 기업의 초과이익을 미국 정부와 나누도록 하고, 기업 정보 공개·시설 접근권 등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중국 등 우려국에 10년간 기술 투자를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역시 ‘공짜 점심’은 없다는 평가입니다.
당장 애리조나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는 TSMC, 텍사스에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 미시간에 설비 투자를 하고 있는 SK실트론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대만 TSMC의 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요청에 미국 애리조나에 400억 불, 우리 돈 약 52조 원에 달하는 투자를 하겠다며 공장을 짓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뉴욕타임스는 2023년 2월 기사에서 비즈니스적으로 말이 안 되는 투자라며 꼬집고 있습니다. 공장 건립에 대만보다 10배 가까이 돈이 들고, 문화적으로 대만 회사가 미국 노동자들을 관리하기가 문화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TSMC의 미국 투자가 전면 재검토가 될 수 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습니다.
실상 이번 심사 기준은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2022년 10월 미국 상무부는 이미 미국 기업이 생산한 18 나노미터 이하 D램과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대상 중국 수출을 금지시켰고, 14 나노미터 이하 로직칩을 생산하는 중국 기업에게 미국 기술을 사용하는 반도체 장비 수출을 금지시킨 바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같은 해 10월, TSMC는 중국의 인공지능(AI) 반도체 업체 비런 테크놀로지(Biren Technology)의 첨단 반도체 위탁생산을 멈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1년간 유예기간을 받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난처한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전체 낸드플래시 생산량의 약 40%를 중국에서 생산 중이고, SK하이닉스는 D램 메모리 반도체 생산량의 절반 정도를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 첨단 반도체 장비 반입이나 공정 개선이 불가능해져 기술 경쟁력에도 밀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 50조 원 이상 투자한 상황이라, 중국 밖으로 옮기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한국과 일본 기업들에게도 쉽지 않은 상황인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2022년 기준 대중국 수출 비중이 22%인 한국 입장에서 미국의 정책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반도체 설비 강국인 일본은 반도체 설비의 33% 이상을 중국으로 수출하고 있습니다. 당장 중국에 수많은 제조 설비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으로서는 미국의 신냉전 조치를 앉아서 지켜볼 수만은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상당수의 아이폰을 중국에서 생산하는 애플 입장에서도 곤혹스러운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공급망이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재 상황에서 중국산을 제외한 별개의 생산 체계를 구축하는 것도 수많은 시간과 자금이 소요되는 일입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과 중국 패권 경쟁에서 반도체를 핵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2022년 5월,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 제일 먼저 순방했던 곳은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이었습니다. 미국은 퀄컴, 엔비디아, AMD, 인텔과 같은 회사를 필두로 반도체 설계 능력은 최상급입니다. 하지만 반도체 생산은 대부분 대만과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만의 TSMC가 전 세계 점유율 53%이고, 삼성전자가 18%로 두 개 회사를 합하면 80%에 이릅니다. 미국으로서는 대만과 한국을 끌어들이는 것이 핵심일 것입니다.
대만은 반도체를 자국의 민주주의를 보호할 수 있는 ‘민주주의 칩’이라고 부릅니다. TSMC의 반도체 생산량의 90%가 대만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도 TSMC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대만을 우방국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대만 간 지정학적 리스크가 첨예할수록 미국은 TSMC의 생산기지를 미국으로 끌어들여 반도체 수급을 안정시키는 한편, 중국의 기술력을 약화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도입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국으로서는 미국과 중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2022년 3월, “칩 4 동맹 (Chip4 alliance)”를 제안한 바 있습니다. 미국이 반도체 설계를 맡고, 한국과 대만은 위탁 생산을, 일본은 소재, 장비를 맡자는 취지로 중국을 견제하자는 것입니다. 반도체 수출의 60% 이상이 중국에 집중되어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동맹을 수락할 수도,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2022년 8월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과 반도체 전쟁을 선언하면서 아시아 동맹국들은 여러모로 곤혹스러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반도체 및 과학법’은 미국과 중국 간 '신냉전'을 선포하는 법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미국 정부는 공개적으로 중국 반도체 산업 지원을 금하는 법안을 아시아 동맹국에게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뜻대로 중국과의 연계성을 줄이자니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과의 경제적 연계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대중국 수출 물량을 줄이자니 어렵고, 그렇다고 미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에서 한걸을 물러나길 원하지도 않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를 빌미로 신냉전 체계로 들어가고 있지만, 우리에게 발언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전 세계 공급망을 주름잡고 있고, 미국으로서도 일방적 강요만을 하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로서는 ‘칩 4 동맹’을 활용해 다자간 협상 테이블로 미국과 다른 우방국을 끌어들이는 것이 답일지도 모릅니다. ‘흑과 백’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미국에 개별 국가들의 첨예한 입장을 내비치며 다양한 선택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옵션을 열어두는 것만이 우리의 살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삼성전자가 짊어지고 있는 짐은 무거울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