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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이 Aug 16. 2024

여름이었다.

24.08.14.수 다정한 밤.

 두꺼운 실로 짠 원피스를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엄마의 품에 안긴다. 얼굴 가장자리에 맺힌 땀이, 넓은 광장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견다기 힘들어 나는 일부러 더 힘을 내어 공원을 달린다. 내가 어렴풋하게 겨우 기억하는 여름의 기억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더위를 많이 탔다. 그래서 여름이면 자주 더위를 먹고 누워 힘없이 괴로움을 견디곤 했다. 학교가 있는 대구에서 여름의 절반을 나고부터는 그런 일이 잦아졌다. 어느 학기에는 교수님이 '배운 곳까지 모두 악보를 다 외워오도록'이라고 하셔서 요령 없이 주말 내내 악보를 외우다가 3주째에 몸살이 심하게 났다. 거기다 타온 감기 몸살약이 독해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한 달을 보냈다. 그리고 침대에서 없는 정신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학교를 생각했다. 죽을 지경이었다.

 여름을 대부분 침대에 누워서 보낸 기억이 많아 여름이라 하면 썩 반가운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가벼워진 옷차림이라던가, 푸른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나 쨍하게 내리는 햇볕 아래 더운 열을 머금은 공기는 언제나 생기 있게 느껴진다. 휴가철이 있어서 조금은 반갑게 느껴지는 탓도 있을 것이다.

 어제는 병원에 가느라 씻고 화장을 간단히 했는데 습한 공기에 땀이 흘러서 선크림이 다 지워졌다. 짜증을 내며 밖으로 나섰다. 더운 여름이 절대 즐겁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다 이런 데에 있다. 불쾌하고 힘들다.

 휴대폰에서 일 년 전 여름 사진을 보여주는 알림이 울렸다. 지금보다 일 년 전 나는 국악원에서 글 쓰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빴고, 덕분에 공연을 많이 보러 다니느라 분주하게 지냈다. 집에서 국악원으로 가려면 공원을 하나 가로질러 갔어야 하는데 나는 그 길을 무척 좋아했다.

 묽은 하늘 아래 쨍한 볕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내리쬔다. 그 사이로 풀 냄새가, 물 흐르는 소리가 새어든다. 그리고 걸어가는 길에는 까치나 비둘기, 운 좋은 날은 두루미도 만날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여름에 대해 가진 기억들이다.

 공부하다 열받아서 집 앞의 그 공원을 밤에 나가 걷다 오기도 했는데 나는 그 공원을 아주 좋아했다. 어릴 적 다리 재활을 하기 위해 자주 걷던 공원이라 어느 쪽에 무엇이 있는지 다 꿰고 있는 익숙한 곳이었다.

 그리고 이번 여름에도 아니나 다를까 나는 연습실을 한 달 쓸 곳을 구해두고 몸져누워서 그 기간을 다 보냈다. 불쾌하고 아픈 감각이 아주 짙게 남은 기분은 여름에 다 몰려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이 여름이 아주 싫지만은 않은 이유는 그 시간에도 더운 공기 아래에도 내가 보고 반할 만한 일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겠지.

 여름을 지난 가을을 기다린다. 가을이 오면 겨울을 기다리고, 봄이 오면 꽃들이 지는 풍경을 아쉬워하면서 거리를 걷는다. 나의 사계절은 그렇게 지나간다. 여름에는 여름이 보여주는 풍경이 있겠지. 오늘이 말복이라는데, 나는 여름이 조금씩 지나 해가 길어진 바깥을 보면서 몹시 기뻐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은 없다. 모두 같은 풍경일 수는 없으니 그때마다 잘 보아두자. 마음에도, 눈에도 담아두자. 언젠가 그리워질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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