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절망하며 연습실에 앉아 있었다. 같이 연습하던 친구는 일찍 떠나고 나는 듣고 싶은 노래가 있어 악기를 꺼냈다. 볼 안쪽에 사랑니에 씹힌 살이 아팠다. 기다려오던 시간인데 나는 우울한 얼굴로 악기를 들고 앉았다.
조용히 불어질 수 없는 노래가 있다.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하는 선율이 있다. 나는 그런 음악들을 들으면 늘 머릿속에 욱여넣고 싶어 하는 버릇이 있다. 악보 없이 악기만 있더라도 불어낼 수 있도록.
어떤 음악가들은 말한다. 악보 안에는 모든 게 담겨있어. 그리고 표현과 해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한다. 음악은 종이에 재현될 수 없다고. 고지식한 낭만주의자인 나는 악보를 박자도 맞추지 않고 연습해보곤 했다. 모든 음악을 카덴자로 불고 싶었다. 수채화로 그리듯 물을 섞어 물감을 풀어서 나도 모르게 나온 색채로 자연스럽게 물들이는 노래를 하고 싶었다. 속이 아프고 시린 날은 유독 연습실에서 오래 머물렀다. 적히지 않은 소리가 듣고 싶었다. 내가 멋대로 만들어낸, 다정한 소리.
환청을 듣고 두려워하며 연습실 구석에 앉아 울었던 날이었다. 이렇다 저렇다 나를 평가하는 말들에 나는 괴로울 정도로 짓이겨져 이미 너덜 해진 마음으로 피아노를 쳤다. 발라드 1번을 엉망으로 소리 내며 속으로 울었다. 괴로운 소리 앞에서는 인격도 뭣도 없었다. 나는 죽어야 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두렵거나 아파도 얼마든지 괜찮은 하찮은 존재였다. 그 소리를 듣게 된 지 2년이 넘었다.
노란색의 따뜻한 조명 아래 불던 묵직하고 무던한 낮은 음의 조합들이 위로가 되던 날이 있었다. 항상 무대 위에 앉은 나를 생각했고 나를 괴롭히는 소리는 그제야 의미를 잃었다. 불투명한 소리를 쓰고 싶었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다정하고 단단한 색을 가진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어제는 연습실에 혼자 남아 산조를 불었다. 자진모리까지 불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살아난 기분이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나서려는데 내가 마구 쌓아둔 악보들이 나를 붙잡는다. 피곤했던 나는 모른 척 문을 닫고 나선다.
햇살이 드는 창가에서 편한 의자에 앉아 겨우 이끌고 온 아픈 몸으로 악기를 불었다. 나는 의자에 늘어지듯 앉아 지나갔구나, 하고 다시 기분 좋은 선율을 보내준다.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다. 연주자는, 또는 음악가는 늘 음악과 이별하고 다시 만난다. 성심껏 연주해 보내주고 다시 자리에 앉아 자신을 닮을 수밖에 없는 소리의 조합을 만들어낸다. 연주자는 보내는 사람이다. 흘러갈 수밖에 없는 세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연습실에서의 추억이 많다.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서 피아노 소리를 듣고 놀라서 도망치듯 나와야 했던 경험이나 너무 아프고 소란스러운 마음에 악기를 안고 구석 자리에 앉아 울었던 시간 같은 것들에 나에게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기억하는 대로 적자면 그 작은 방에서의 소리는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바깥에서 화려한 복장으로 무대에 서지 않아도, 넓은 하늘 아래서 바람을 맞으며 연주하지 않아도 사랑스러웠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연습이 더뎠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손목에 붕대를 감고 울면서 악보를 외우고 나간 밤은 초라하고 차가운 검은색을 띠고 있었고 나는 그게 아주 짙은 어둠이라고 여겼다. 아픈 말만 하고 싶지 않다고 늘 생각했지만 아팠다. 견딜 수 없이 아팠다.
부산에서도 친구와 연습실을 빌렸다. 그리고 오늘이 지나 내일이 연습실을 쓸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다. 공간이 주는 분위기를 아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편인데, 이번 연습실은 사람이 없어 고요하고 으스스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악단에 들어갈 준비를 하려 한다. 그러려면 나도 그 부분에서는 성실해야 한다고 생각해 부지런히 연습해두려 했는데 이번에도 마음 같지 않다. 가끔 지나간 소리를 붙잡아 들으려 녹음기를 켜곤 했다. 그리고 친구와 가족들에게 보내주곤 했는데 이번 달은 그럴 겨를도 없이 지나갔다. 다시 그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불게 될 것이다. 아프고 지쳐도 살아가고 싶어지는 음악을 듣게 될 것이다. 모든 것에는 차례가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자. 그러면 나는 다시 내가 만든 여러 가지 빛깔로 빛나는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