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하루의 여행

햇볕을 찾아 남쪽으로

by 경계인



여름이 올 듯 말 듯 따분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 무렵, 차가운 타일 바닥에 북향의 집이 지긋지긋해진 나는 남편에게 소리쳤다.


"햇볕이 필요해. 온몸을 강한 햇빛에 바삭하게 말리고 싶다구!"


나보다는 덜 즉흥적인 남편을 충동질해 우리는 맥주와 담요를 급히 챙겨 들고 남쪽으로 로드트립을 떠났다.

그런데 급하게 챙겨 든 게 하필 담요와 맥주라니. 햇볕을 쬐러 간다면서 선크림이라든가,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 가다가 차에서 잠깐 눈을 붙일지도 모르니 담요는 그렇다 치지만 맥주는 내 이성이 닿지 않는 곳의 진실한 부름이었던 것이다.

자정의 시각이었다. 한 밤의 로드트립이라니, 그것도 남쪽으로. 설레는 마음은 나를 더욱 우왕좌왕하게 만들었고, 결국 담요와 맥주만을 가방에 넣은 채 제법 두툼한 스웨터에 머플러까지 걸치고 집을 나섰다. 더운 지역으로 간다면서 말이다.


우리의 목적은 고흐 그림의 배경이 되었던 아를을 거쳐 지중해가 보이는 카흐농을 지나 남편이 학교를 다녔던 몽펠리에까지 돌아보고 저녁에 리옹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론 강(Rhône)을 따라 남쪽으로 여섯 시간 여를 달려 도착한 아를(Arles).





10년 만의 아를(Arles)



정확히 10년 전,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아를의 로마 원형경기장과 고흐가 그린 밤의 카페를 보게 되었다. 그때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던 참에 아를은 파리 다음으로 무조건 가야만 하는 도시가 되어버렸다. 10년 전에도 나는 여전히 충동적이어서 숙소도 예약하지 않고 그저 다큐멘터리에서 본 이미지만 머릿속에 간직한 채 파리에서 아를로 가는 기차를 탔었다.


뜨거운 태양과 로마제국의 흔적, 오밀조밀한 골목길, 친절하고 쾌활한 사람들. 프랑스는, 아니 아를은 시간을 먹지 않는 도시였다. 약간 더 나이가 든 모습으로 거의 모든 것이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아침 일곱 시에 도착했다. 마을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 전경을 내려다보니 쏟아지는 남프랑스의 햇살이 붉은 지붕에 내려앉는다. 10년 전에도 걸었던 길을 지금은 남편과 걷고 있다. 역시 인생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부족한 돈으로 사 먹었던 한 끼의 푸짐한 식사, 밤에 브라스리에서 마셨던 맥주. 그 가게들이 간판도 바뀌지 않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환경이 변하지 않는 삶은 어떤 것일까. 10년이 지나도, 3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 건물의 형태나 창문의 색깔이라든가, 거리의 울퉁불퉁한 자갈조차도 그대로다. 다만 내 마음이 그때보다 조금 더 낡았다. 경이로움으로 가득했던 이 도시가 더 이상 새롭지 않은 것이다. 낭만적이라 여겼던 창틀의 벗겨진 페인트가, 누군가 밟아 문드러진 길바닥의 개똥이 더는 프랑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치 공기 중에 붕 떠 있는듯한 감정으로 와 닿지 않는다. 낡은 창문도, 길바닥의 개똥도 이제는 나의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지금 그런 풍경들은 그저 도시의 남루한 모습 중 하나로서 인식되는 것이다. 10년의 세월과, 그 시간 동안 서서히 변해간 나의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IMG_7855.JPG
IMG_7862.jpg



좁은 차에서 몸을 구겨 잔 탓인지 갑자기 피로와 졸음이 몰려왔다. 지나가던 주민이 커피가 정말 맛있다며 콜럼비아 카페를 추천해주었다. 우리는 테라스에 앉아 콜럼비아 원두를 갈아 진하게 내린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남프랑스에서 꽤 규모가 크다는 아를의 장이 열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리고 점심으로 먹을 캄파뉴와 올리브 몇 가지, 또 방울토마토와 살구를 샀다. 남프랑스의 강한 햇살을 받아 빨갛고 노란 채소들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행복한 기분이 들게 했다.




IMG_7898.JPG
IMG_7896.JPG
IMG_7895.JPG



간단히 장을 보고 나서 바다를 보러 다시 차를 몰았다.

리옹에서 늘 노래를 부르던 지중해로.






더 남쪽으로...



리옹은 아직 꽤 쌀쌀한데 남쪽은 남쪽인가 보다. 순간 더운 바람이 얼굴을 휙 스친다. 고운 결의 모래가 뺨과 목에 달라붙는다. 우리는 레 생트 마리 드 라 메르(Les Saintes Maries de la Mer)에 도착했다. 바다를 보러 밤새 달려온 것이다. 태양과 달큰한 바람이 견딜 수 없는 피로를 몰고 왔다.

우선 아를의 마켓에서 산 신선한 과일과 빵으로 허기를 달랬다. 집에서 가져간 맥주가 이때 빛을 발한다. 내 무의식은 내가 무엇을 원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시원하진 않았지만 갈증을 달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피곤한 몸에 알코올이 들어가니 남편이나 나나 둘 다 눈을 뜰 수조차 없는 지경이 되었다. 모래 바람을 맞아 피부는 버석하고, 눈 밑의 다크서클이 더욱 길게 드리워졌다. 서로의 모습을 보며 좀비 같다고 놀리며 웃다가 우리는 차에서 곯아떨어졌다. 잠결에 파도치는 소리가 일렁였다. 놀러 온 스페인 가족의 따닥 거리는 말소리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IMG_7919.JPG
IMG_7916.JPG



모래사장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주위를 둘러보니 죄다 비키니 차림이다. 그제야 꾸역꾸역 싸매고 있던 머플러를 푼다. 어쩐지 꽤 덥다고 생각했다. 바다에 간다고 들떠 있었으면서 어째서 수영복 챙길 생각은 못했을까. 우리는 에그 모르트(Aigues-Mortes)로 가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섰다. 카마르그(Camargue)라고 부르는 습지 안에 형성되어 있는 성곽도시, 에그 모르트에 가기 위해선 간혹 배를 이용해야 할 때가 있었다. 길게 늘어선 차들 가운데 말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배에 함께 올라선 말은 안절부절못하고, 주인 따라 차에 동승한 개는 그런 말을 향해 끊임없이 짖어댔다.



IMG_7937.jpg
IMG_7932.jpg



습지대를 건너 조금 달리자 이번에는 넓은 평야의 포도밭이 나타난다. 주로 로제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라고 한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예상치 못한 풍경에 나지막이 탄성을 지른다. 리옹을 떠나온 지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엄청난 모험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피로와 갑작스러운 더위가 겹쳐 정신이 몽롱해진 탓일까.






에그 모르트(Aigues-Mortes), 작은 마을의 얼굴들




IMG_7968.JPG
IMG_7971.JPG
IMG_7969.JPG
IMG_7973.jpg
IMG_7972.JPG



13세기에 지어진 성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이 작은 마을에서 유독 내 눈에 띈 건 다양한 컬러의 집 출입문이었다. 엽서에서나 보았을법한 아기자기한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느라 나는 어느새 남의 집 출입문인 것도 잊고 있었다.


오후가 될수록 날은 점점 더 더워지기 시작했다. 남프랑스의 강한 햇살이 무방비로 살갗을 태우고 있었다. 겨울이 긴 프랑스에서 오랜 시간 축적된 우울과 곰팡이가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몸이 지나치게 데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해를 피하지 않았다. 리옹에 완전한 여름이 찾아올 때까지 이 기운을 간직하고 있어야만 하니까.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지만 마치 사나흘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길고도 뜨거운 하루였다. 그렇게 우리의 소기의 목적은 달성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