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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스레 Jan 03. 2021

14. 일희일비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지지부진한 검사 결과들이 점에서 촘촘하게 이어져 선으로 그어졌다.

혈액 검사 결과는 하루에 단 한 번만 도출되는데, 그래프가 그려졌다니. 수개월이 걸렸다는 소리다.

다행히 점들은 상향곡선을 만들어냈고, 드디어 안정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담당 교수님은 여간해선 희망의 메시지는 남발하지 않았다. 하긴, 입원 이래 여태껏 많이 들었던 교수님 멘트 1위가 "좀 더 지켜봅시다" , 2위가 "추이를 기다려봅시다"다. 비슷하네? 여하튼 다음 치료 단계로는 쉽사리 넘어가지 못했다.


혈장 교환술 담당 간호사님들과도 어느새 친해져 반갑게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분들도 "교수님이 언제까지 받아야 한다~ 이런 말씀 없으셨어요?"라고 자주 물어오셨고, 아련한 눈빛으로 "글쎄요" 답하곤 했다. 모두들 이쯤이면 다른 계획이 있으실 텐데..? 할 즈음.  담당 교수님이 드디어 다음 단계 치료를 시작하자고 하셨다. 매일 받는 혈장 교환술을 퐁당퐁당으로 받아보고, 복용 중인 약물의 용량도 2/3으로 줄이기였다. 경과를 보며 혈장교환술을 중지할 수 있는 시점을 보자 하셨다. 침착하게 "넵, 알겠습니다" 했지만 내적 댄스는 이미 시작, 속으론 개다리춤추며 난리가 났었다.





격일로 받기를 일주일, 결과는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1차 시도는 역시나 실패.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더니 완전히 궤도에서 이탈. 2차 시도를 하기 전까지 2주일 이상을 또 기다리며, 반등시켜 놓아야 한다. 여기서 '앞길 창창 30대에 병원에서 이게 뭐람?'이라고 나약한 생각을 하는 순간, 기다림의 시간은 치즈처럼 쭈우욱 늘어진다. 맞다..  이 것은 순도 100%의 경험이다. 억겁의 시간이 흐르고 2차, 3차 시도가 이어졌다.


'스트레스도 현저히 줄었고, 몸에 안 좋다는 것은 1도 안 하는 어린이 라이프로 살며, 잠도 풍풍 잘 자고 있는데 왜 때문에 회복이 안 되는 걸까?'라고 매일 억울해봤자 원인불명 희귀병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력하게도 3차 시도까지 모조리 실패를 했고, 4차 시도를 준비했다. 혈장 교환술 없이 온전히 내 혈액으로는 좀처럼 버티질 못하다니.. 희망찬 의학 드라마로는 전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을 다잡았다. 내 생에 재입원은 없다 그러니 완벽하게 치료받고 나가자. 편하게 마음을 먹기로 했고, 긍정의 아이콘인 남편도 물개 박수를 쳐주며 응원해 주었다. 남편한테는 주식시장보다 한 시간 이른 오전 8시에 업데이트된 나의 혈액 검사 결과를 매일 캡처하여 보내준다. 그러면 나 몰래 '멘트 학원'에 다니는지, 매정한 하향곡선에도 찰떡같은 격려 메시지를 보내온다. 비결이 뭐냐고 묻자 '일희일비'만 조심하여 배려심 1g과 사랑 99g을 녹이면 된다고 했다. 어뭬뭬,, 사랑꾼이셨어요? ㅎㅎ


긍정맨 키다리 아저씨는 언제나 위로중이다


입원 전에는 치열하게 싸웠고 미워도 했던 남편이 입원 후에는 완벽한 내편이 돼버렸다. 의학 드라마는 저조하나 로맨스 드라마로 때아닌 춘풍이 불었달까. 처음부터 최수종과 하희라, 빈지노와 미초바 커플 모드는 아니었다. 서로 맹렬히 자기주장만 하며 똑같이 멍청이 같이 굴었던 신혼 1년이 지날 즈음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다행히 붙어있을 땐 어리석어도 따로 떨어져 놓으면 멀쩡한 사람들이었다. 강제로 떨어져 보니 둘은 신속하게 깨달았고, 더 이상 다투며, 아프지 말자고 두 손 꼭 잡고 울며 다짐했다. 신기하게도 입원 이후 둘은 한 번도 싸우거나 감정 상한 일이 없었다. 원래 가능한 일이었구나..?? ㅎㅎ   




4차 시도가 시작된 날이었다.

간절했고 이상하게도 덤덤했다. 양가감정이 묘하게 공존하였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어쩌지?라는 생각 따윈 접어두고, 아무 생각 없이 받자. 명상이 깊어져 어느 순간 몰입의 최고조에 이르면 '음과 양의 합이 제로'의 단계가 온다고 하던데,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편안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마음가짐이 단정해졌고, 머리는 맑아졌다. 확실히 예전보단 탄탄해진 나의 회복 탄력성에 뿌듯함을 느끼며, 혈액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웬일인지 검사 결과가 늦어져 입이 바짝 말랐지만 미지근한 물 한잔을 마셔가며 조금씩 가라앉는 감정을 추슬렀다.


오후 4시가 되어도 혈액 검사 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병원은 어수선했다. 의료파업이 계속되고 있으니 매일 어수선했음에도 뭔가 결이 다른 분주함이 있었다. 수상한 기운을 감지했고, 커튼 안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며 귀 쫑긋 하고 있다 멀리서 들려온 딱 한마디를 캐치했다.


터졌다..



그 한마디에 맑았던 정신은 거짓말 같이 와장창창 깨졌고, 이내 병원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삽시간에 평화가 깨지고, 모두가 웅성웅성 거리며 모든 환자들로 하여금 커튼 밖에 나오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렇다.. 결국 터질 것이 터졌다. 그것도 바로 내 옆방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다.


WHAT???  



 오후 4시경에 검사완료되어 확진자 발표가 되었고, 기사는 오후 7시부터 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코에 길쭉한 면봉이 훅 들어와 코로나 검사를 했고, 우주인 복장을 한 의료진이 대거 투입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병실 내 환자들에게 이런저런 설명과 지시 사항을 전달해주었다. 앞으로 1시간 이내로 모든 짐을 싸서 격리병동으로 긴급히 이동할 예정이며, 역학조사가 진행 중이니 전달받은 코로나 감염증 노출자 조사지를 작성하라 했다.   


잠깐이라도 마스크를 벗은 적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란다. 정신이 하나도 없고 두렵다.

얄궂게도 아산병원에서 면역력 최하인 혈액암 병동 7~8층에 코로나 폭탄이 터졌단다. 병원 측도 패닉이고, 환자들은 공포 그 자체였다. 전달받은 방역복을 입고 거울을 보니, 공포감은 한층 더해졌다. 비현실적이면서 지나치게 현실이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동시에 온다. 그러니 일희일비하지 말자는 남편 말을 다시금 되새긴다. 그럼에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혼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어쩐지 요상하게 점잖은 하루였다 싶었다.


아놔!! 젠장맞을.. 뭐 이런 근본 없는 전개니.?!    


9/2일 병동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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