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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냉이꽃 Oct 18. 2018

영화 <굿윌헌팅>의 사람들


<굿윌헌팅>이라는 너무나 유명한 영화가 있다. 천재 윌의 이야기다. 오래전에 보고 또 본 것이지만 다시 봐도 또 좋았다. 처음 봤을 때는 "네 잘못이 아니다" 말하는 숀 교수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다른 건 다 묻혔던 것 같다. 


어린 시절, 가장 잘난이와 주인공만 눈에 들어왔던 것은 공존의 가치를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무관심했고 무시했던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한 시대를 함께 사는 우리의 모습이었다. 사람을 무시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잘은 모르지만 나름대로 주인공이 아닌 주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해 본다.


윌의 친구, 처키


유유상종이라 했듯이 처키 역시 영리하고 배포 좋은 젊은이다. 하버드 대학 근처 술집에서 여대생을 꼬시는 허세가 있었고, 윌을 대신해 맥닐 회사에 면접을 가서 푼돈을 뜯어내는 배짱도 있었다. 그는 윌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니가 20년 후에도 여기 살면서 노무자로 일하고 우리 집에서 비디오나 때리고 있으면 널 죽여버릴 거야. 널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야. 날 위해서라고. 50이 되어도 나는 육체노동을 하고 있을 거야. 그건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너는 지금 당첨될 복권을 깔고 앉고서도 너무 겁이 많아 돈으로 못 바꾸는 꼴이라고. 병신 같은 짓이지. 여기서 20년이나 곯는 건 우리에 대한 모욕이라고.

매일 아침 너희 집에 들러 널 깨우고 같이 외출해서 한껏 취하며 웃는 것도 좋아. 하지만 내 생애 최고의 날이 언젠지 알아? 내가 너희 집 골목에 들어서서 네 집 문을 두드려도 네가 없을 때야. 


숀교수는 램보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윌)가  멍청한 친구들과 해롱대며 어울리는 이유는, 윌이 부탁만 하면 자넬 칠 수 있는 신의를 갖고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처키는 윌을 위해 "목숨도 내놓을 가족"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영혼의 짝은 아니라 했다. 교감할 수 없는 친구는 허울뿐인 인간관계라고 말한다. 


숀 교수의 말처럼 윌이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니었고 처키와의 우정도 아니었다. 윌은 영혼의 짝인 스카일라를 찾아 떠났다. 


처키가 사는 방법은 필요할 땐 옆에 있어 주고, 보내야 할 땐 가슴 한쪽이 무너져도 보내주는 것이다. 자식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기도 했던 우리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윌은 처키의 희망이고 자존심이었다. 



대리면접을 보며 면접관을 우롱하는 처키, 그리고 윌이 떠나고 없는 집을 확인하며 만감이 교차한다.


건강한 찌질이 모건


그는 동물적이다. 자존심이 없고 자기애도 딱히 없다. 친구에게 노상 빌붙어 얻어먹고, 처키에게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던져주는 빵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먹는다. 불만이나 의문이 있으면 즉각 말하고 부끄러움이나 망설임이 없다. 친구의 복수를 위한 싸움판에도 딱히 낄 마음도 없다. 그러나 막상 나가면 죽어라 싸운다. 눈치는 엄청 빠르다. 집에 비디오가 없으면 친구네 엄마방에서라도 포르노를 보고 욕구는 즉각 해결하고 나온다. 그는 엄숙한 인간의 가치, 내지는 심각한 것이 없다. 순간에 충실하고 속에 묻어 두지도 않는다. 가난하고 못 배웠지만 무기력증이나 자기 연민에 빠져 삶을 소진하지 않는다. 


모건의 유쾌한 장면이 있다. 윌이 떠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총알같이 튀어나와 윌이 타던 앞자리를 차치한다. 낮이고 밤이고 붙어살던 친구지만 떠나면 그걸로 끝이다. 얼마나 깔끔하고 속 시원했는지 모른다. 나는 좋아도 좋다 소리 못했고 싫은데도 양보했다. 모건의 전광석화 같은 모습을 보라. 나도 그렇게 솔직하게 살고 싶었다. 


모건이 사는 방법, 체면이나 뭐 그런 건 개나 줘버려라.



친구를 위해 건달을 패는 모건, 윌이 떠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신이 나서 윌의 자리를 차지하는 모건


존재감 없는 빌


항상 같이 어울리지만 그는 대사가 거의 없다. 술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고, 그저 웃거나 혹은 우울하다. 술에 취해 엎드려 있거나,  말없이 피아노 건반을 튕기거나, 뒷좌석을 그냥 채우고 있다. 그러나 패싸움에는 순서를 따질 겨를도 없이 튀어나간다. 평소에는 점잖지만 죽도록 맞아도 포기하지 않는 근성을 지니고 있다. 어렵게 부속품을 모아 윌에게 선물할 차를 만들었지만 그는 요란하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낮은 목소리로 친구를 살피기도 하고 사려가 깊다. 


빌이 사는 방법은 그냥 섞여 사는 것이다.  기쁠 때나 힘들 때나 빌은 항상 그 자리에 함께 있다. 말없는 사람들은 내면의 열정과 근성이 있다. 그는 혼자 끙끙 앓을지는 몰라도 진지하고 성실하게 잘 살아갈 것으로 믿어진다.나름을 무게감을 가지고 이 패거리에 잘 어울려 섞이는 빌이다.





MIT 대학의 뻔뻔한 노동자들


그들은 지저분한 작업실에 앉아 있었다.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당당하다. 교수가 원한다고 아무 정보나 '네네.. ' 하며 내어 주지도 않는다. 최소한 그들은 비굴하지 않았다. 교수 앞이라고 결코 쫄지 않는다. 니가 교수면 나는 청소학 박사라며 맞짱 뜬다. 램보 교수 일행의 뒤통수에 대고 재수탱이라며 웃어제낀다.


그들이 사는 방법,  나를 무시하는 것들은 내가 먼저 무시해 버리겠다. 





램보 교수는 용기가 있었다


윌 : 정답이라니까요. 집에 가서 더 연구해 보세요. 정답을 줘도 헛소리만 해대는 교수님을 보는 것도 지겨워! 

윌은 수학 문제의 답이 적힌 종이에 불을 붙여 던져버린다. 램보는 기겁을 하며 뛰어간다. 다급하게 불을 끈 답지를 들고 그는 주저앉는다. 램보 교수의 자존심은 처참하게 뭉개진다.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상을 받았던 최고의 수학자가 말이다.

램보 : 네 말이 맞아. 난 이걸 증명할 수 없다. 널 차라리 못 만났더라면 할 때도 있어. 그럼 밤에 잠 못 이루지도, 세상에 너 같은 인재들이 많을 거란 생각도 안 했겠지. 재능을 헛되이 쓰는 걸 보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그는 숀 교수에게 고백했다.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은 자신을 몰아 댔기 때문이라고. 성취욕과 자기애가 강한 사람의 상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개인의 자존심보다는 학문을 더 소중히 여겼다. 자기에 대한 사랑보다는 수학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더 컸다. 그래서 고집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는 <인정하는 용기>를 통해 열등감을 넘어선 것이다. 또한, 아인슈타인이 친구들이랑 술타령 하지않고 공부를 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처럼 윌도 사회적 역할을 다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윌을 끝까지 도왔다.


램보 교수가 사는 방법은 무너져야 할 때 무너지는 것이다. 더 큰 가치 앞에서 솔직해질 수 있었고 자기를 내려놓고 기꺼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의 솔직함은 자신은 물론 숀 교수와의 화해도 가능하게 했다. 그는 더 행복해지고 풍요로워졌으며 따뜻하고 원숙해 보였다.



윌이 태워버린 답지를 들고 망연자실하는 램보 교수.



차례대로 무너지는 엘리트들


MIT의 노교수는 윌이 내놓은 정답 앞에서 입을 다문다. 그는 천재의 등장을 기뻐하지도 못하고 축하하지도 못한다. 그런 아량은 없는 인물이다. 자신이 이 문제를 풀었다면 엄청나게 기뻐했겠지만. 전형적인 에고이스트고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는 말 한마디 없이 방에서 나가버린다. 


좌절의 경험이 없으면 면역력도 없다. 그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못하고 이 난감한 자리를 회피한다. 자신을 솔직하게 대면한 적이 한 번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열등감을 가장 못 견디는 인물이 이 노교수가 아닐까. 고지식하고 권위적이며 완고한 그의 성격은 해결되지 못한 심리적 문제를 엿보게 한다. 그는 화면에서 퇴장했지만 화면 뒤의 이야기가 더 복잡할 수도 있다. 좌절감과 수치심을 그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램보 교수는 자조 섞인 웃음으로 이 노교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교수가 사는 방법은 회피였다.




램보 교수의 조교, 탐 


그는 항상 누군가의 등 뒤에 등장한다. 조용한 관찰자처럼 보인다. 윌과 숀 교수가 수학 문제 풀이의 희열에 빠져 있을 때도 그는 지켜보는 자이다. 탐은 그 대열에 낄 수가 없다.  


그는 천재가 풀어낸 문제의 정답을 알아보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얼마 후면 MIT 교수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학문적 열정과 성취욕구가 없을 수가 없다. 이름난 교수의 조교라면 그도 한때는 촉망받고 주목받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존재감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빠질 곳은 빠지면서 균형감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런 그도 가끔 먼 곳을 바라보거나, 등 뒤에서 윌과 램보를 바라본다.  겉으로는 입이 무겁고 겸손하지만 속에서는 많은 판단을 하고 있다. 어쩌면 그 역시 가장 잘난 사람일지도 모른다. 

탐이 윌에게 :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천재적인지 모르고 지나쳐. 믿어주는 선생을 못 만났기 때문이야. 결국 자신이 멍청하다고 믿게 되지. 넌 교수님의 노력에 감사해야 해. 너와 함께 일하는걸 너무 즐거워하셔. 널 해치려는 게 아냐.

자존감이 추락한 노교수에게도 '세상엔 행운아가 많다. 그리고 당신은 진정 뛰어난 사람이다'는 사실을 조용히 말해준다. 현실감각도 있고 적절하게 타협하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맞는지는 몰라도 내눈에는 그리 보인다.


탐, 알 건 다 안다. 그러나 가볍게 입을 놀리지는 않겠다.  





마음수련 명상 이야기


마음수련 명상에서는 사람은 각자의 마음세계에 살고 있다고 설명한다. 각자가 보고 들은 경험세계는 모두 뇌에 입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70억 인구는 70억 개의 마음세계를 가지고 있고 70억개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마치 생김새가 다르듯이 마음도 제각각이다. 그러니 상처받는 일은 다반사다. 서로 마음이 다른 사람이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주로 우리는 나는 빵을 먹어야겠는데 너는 왜 밥을 먹느냐로 싸운다. 


만약에 각자가 가진 마음을 버릴수만 있다면 사람은 거울같이 살 수 있지 않겠느냐가 마음수련 명상의 명제다. 아니면 나 하나라도 상충되는 마음이 버려진다면 어떨까. 편견없이, 옳다 그르다 판단없이 상대를 그냥 그대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상처는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배고프지 않은데 일을 했겠는가. 아프지 않은데 밤새 고민했겠는가. 아프니 청춘이듯이 아프니 절에도 가고 성당에도 가고 마음수련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상처도 고맙고 어딘가에 길이 있다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부대끼며 살아온 우리는 고통으로 더욱 사람다워졌고 한 걸음 더 내딛게 되었다. 마음이 없으면 서로 다른 사람도 공존할 수 있다. 소나무와 다람쥐가 공존하고 풀과 꽃이 공존하듯이 인간도 아름다운 삶의 방식을 찾게 될 것이다. 내가 마음수련 명상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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