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며 명상하기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은 남의 사정을 헤아릴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사람의 생각은 뇌에 있다. 자기의 뇌는 응당 자기 경험만 저장된 곳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사람이 안다는 것은 자기만의 색안경일 수 밖에 없다. 무슨 수로 남의 머리 속을 알겠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교감을 원하지만 나를 비춰줄 거울이 그에게는 없다. 공감이라 함은 감정이입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고 그래서 어긋날 때가 더 많았다. 아마도 이러한 사람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해서 타인에 대해 무지하며 무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의 철벽 같은 마음도 무너질 수 있을까? 그래서 너와 나 사이가 강물처럼 넘실대며 흐를 수도 있을까?
각자는 자기 바쁘고 힘든 것 말고는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인데 나는 끊임없이 나를 딱딱 몰라준다고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대체 누구를 딱딱 알아줘서 이런 기대를 자꾸 하는지 모르겠다.
직장에서 작은 일을 하나 치러 내고 나니 작고 소소한 원망 거리가 생겼다. 욕할 사람이 두어 명 생긴 것이다. 한마디는 하고 넘어가야겠다 싶었다. 한마디는 아주 여러 마디가 되어 버렸다. 행사에 대한 보고서를 장문의 글로 쓰게 된 것이다.
쓰다 보니 꾹 참았던 말 한마디며, 싸가지없고 철없다 싶던 한마디, 잠재웠던 사소한 노여움이 슬슬 되새겨졌다. 성질나는 글을 쓰면서 혼자 열이 뻗쳤다. 너 또 시작이냐 싶었다. 나는 멈추기로 했다.
직선적이고 다혈질인 경상도 토박이. 나는 세련되고 냉정하게 한마디 콕! 이런 걸 잘 못한다. 그런 문화를 접한 적도 없다. 물론 여러 마디도 못한다. 버벅거린다.
그래서 글로 피드백을 하기로 한 것이다. 말이 보고서지 누가 써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나의 화를 최대한 합리적으로 뿜어내고 싶은, 말하자면 분풀이였다. '나는 잘했는데 너 때문에 미치겠어, 너! 그러면 안되는 거 아냐?' 뭐 그런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말 일을 개선할 생각이라면 내가 조금 더 합리적으로 세심하게 판을 짜면 안 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일단 좀 걸으며 나를 돌아보기로 했다.
지금껏 자주 나를 돌아보는 척했지만 사실 서툴고 어려운 일이 자기를 돌아보는 일이었다. "나는 잘했고 할 만큼 했다.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이럴 리가 없지. 안 그러냐?" 하는 마음이 속에 꽉 차 있는데 어떻게 자기를 돌아볼 수가 있을까.
그리고 내가 잘했다는 이런 식의 말투는 어디서 많이 듣던 것이다. 지성과 이성은 눈 씻고 봐도 없고 비합리적인 감정만 있다고 여겨지던 엄마의 18번이었다. 나는 착한 딸로 살다가 20대 중반부터 엄마에게 대들기 시작했다. '길을 막고 물어봐라, 나 같은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런 말을 징그럽게 들으며 엄마와 싸웠다.
나의 내면은 엄마와 꼭 닮아 있었다. 뿌리 깊은 열등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치부를 숨기면서도 겉으로는 못났다 자책한다. 겸손의 가면 속에는 자기애와 자기신뢰가 바위덩이처럼 단단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뽐내고 싶고 드러내고 싶은 마음은 겸허하게 포장한다. 사실 그 포장에 속을 거라 믿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다.
이토록 기만으로 가득 찬 내가 대체 무슨 시비를 가리고 싶어 그렇게 화를 낸 것일까? 맞고 틀리고를 판단하던 그 밑바닥엔 무엇이 있었을까.
그 사람이 두렵고 밉고 화가 나고 마음이 괴로울 때는 마음을 쉬게 하라. 마음을 쉰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는 대신 나의 불쾌한 감정을 분석하고 나를 이해하고 해명하는 일이다.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과제다. 그리고 나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 감정적 기억의 저장고에 무엇이 축적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 왜 나는 사소한 일에 화를 낼까? > 가토 다이조, 추수밭, 2016
지저분한 인간의 감정 속에서 헤매고 있던 그 시간에도 자연은 말없이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누구의 손길이 이렇게 아름다울까. 산책로와 정원 곳곳은 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문만 열면 꽃밭이라고 누군가 자랑하던 스위스도 부럽지 않고, 아른아른한 모네의 정원도 부럽지 않았다. 달리 천국이 더 필요할까 싶었다.
그네에 앉아 흔들거리며 잡다한 마음을 날려본다. 내 마음 밖의 세상은 유리알같이 맑고 아름답다. 이토록 아름답고 이토록 풍족한 세상을 나는 왜 뺨을 한대씩 얻어맞아야 알게 되는 것일까. 왜 잊고 사는 것이며 왜 툭하면 괴로워하는 것일까. 왜 스스로 지옥을 선택하는 것일까.
모든 것이 다를 수밖에 없는 너와 내가 만났다. 어떻게 갈등이 없기를 바라겠는가. 갈등이야 있든 말든 '나만 건드리지 말아달라' 이런 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을까.
이 욕심이 이루어지려면, 나는 대자유를 누리며 내 마음대로 할지라도 '너희들이 다 이해하고 양보하고 참아야' 가능한 일이다. 내가 산책을 할 때의 꽃들처럼 말이다. 꽃은 밟혀도 꺾여도, 좋다 싫다 변덕을 부려도 말이 없다. 조금만 생각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나 나는 그 조금의 사고를 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남 탓을 하며 나만 편하면 그만인 이기적 평화를 갈구했다. 나의 문제를 돌아보기 전에 '세상은 왜 이 모양이고, 어쩌려고 인간은 여기까지 왔나' 한탄을 먼저 했다. 마치 세상을 많이 염려하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나는 다시 좋지 않은 머리로 생각해 본다. 분노로 이글거릴 때 내가 정말 원한 것은 무엇일까? 정의, 바름, 합리, 공정.. 뭐 그런 포장지를 뜯으면 무엇이 있었을까.
나에게 무릎 꿇고 항복하기를 바란 것일까? '대단하십니다, 몰라뵜습니다'하기를 바랬을까?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일까? 나를 건드리는 사람은 모두 전멸시키고 '이젠 알겠지? 내가 누군지 알았지?' 이러고 싶었던 것일까? 보복하고 싶었던 것일까? 전쟁놀이하는 골목대장도 아니고 나이를 어디로 처먹었나...
설혹 원하는 대로 다 되었다 치자. 나는, 또 우리는 행복할 것인가?
돌아보고 돌아보는 동안 사실 타인에 대한 분노는 이미 사그라들고 없어졌다. 이것은 온전히 나의 문제였다.
보고서랍시고 쓴 글을 다시 읽어 보았다. 내가 하는 일에 왜 제대로 협조하지 않았냐는 것이 골자였다. 보는 사람이 참으로 불편했을 글이었고 나는 물론 누구에게도 도움되지 않았을 글이었다. 결국 나를 알아달라는 말이었고 참으로 교만한 질책의 말이었으며, 공정한 듯한 어투는 교활하기까지 했다. 해님 달님 동화에서 엄마를 잡아먹은 호랑이가 엄마 옷을 입고 나타난 것처럼 말이다.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손에 밀가루를 희게 묻힌 그 호랑이처럼 나는 분노를 숨기고 평정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내가 꾹 참고 화를 삭이는 대신 다른 사람들이 참아주고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줬다면 어땠을까? 누군가는 나로 인해 상처받고 분노를 되씹고 있다는 것을 꿈에라도 알았을까. 조금의 갈등도 없이 일이 끝났더라면 내가 느끼는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한껏 높아진 자만으로 마냥 뿌듯했을까? 내뜻대로 된 세상이 아름다웠을까?
자기만족... 대체 그게 뭐라고... 인간이 너무 초라했다. 나는 이런 걸 위해 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일을 해도 행복하지 않았다. 일이 끝나면 왜 나의 잘남과 불평만 남게 되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은 나의 밑바닥 그 오만과 간악함을 너무나 잘 읽고 있었다.
세상이 내 뜻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참 고마웠다. 그리고 나를 돌아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고 기다려줘서 고맙다. 돌아보는 법을 알려준 마음수련 명상 방법도 너무 고맙다. 어울려서 너무 아름다운 무욕의 꽃밭도 너무 고맙다. 나도 너처럼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