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사하게 싸우고 마음수련 명상하기
"아... 깝깝허네..."
어르신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기세로 버티셨다.
그리고 나는 이 어르신이 매우 얄미워졌다.
" 조금만 기다리세요. 담당자가 오면 휴게실에 갖다 놓을 거예요. "
어르신이 요구하신 것은 오늘 신문이 왔으면 달라는 거다. 고작 그 일을 두고 나는 담당자가 할 일이라고 깐깐하게 굴었다. 우리는 같이 버텼다.
나는 왜 어르신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주기가 싫었을까.
나의 속마음은 이런 것이었다. "나를 귀찮게 하지 마세요." 혹은 "왜 어르신 고집대로 하세요? 그런다고 다 들어주지 않아요." 뭐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직원이라는 권력을 휘두르며 어르신을 갈구게 된 것이다.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마음보다는 "뭐든 뜻대로 되는 건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지.." 하는 마음이 강했다. 상대방을 뜯어고치려는 심산인 것이다. 새삼스러운 태도도 아니다. 대부분의 생애를 이런 마음을 부리며 살았고, 모친과도 주로 이런 일로 다투었던 인간이다, 내가. 명상도 한다는 인간이,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닌데... 정말 남사스러운 하루였다. 우편물 뒤져 신문 하나 찾는 것이 몇 분이나 걸린다고 그랬을까? 나는 정말 왜 그랬을까?
첫째, 나를 귀찮게 만드는 것이 싫었다. 나의 조용한 시간과 안락함을 방해받고 싶지않은 지극히 이기적인 욕구가 모든 것을 우선하였다. 나머지는 핑게다.
둘째, 자기 확신이 문제였다.
나는 옳고 어르신은 문제가 있다는 편견은 편향적인 확신으로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가 본 것, 느낀 것, 자기 경험에서 만들어진 신념은 당연히 맞다고 믿는다. 우리의 일상은 오해들로 차고 넘친다. 대부분 그 때문에 싸운다.
어르신과 나도 평생을 두고 내 생각이 맞다고 우기며 살았던 사람이다. 자기를 의심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삐걱거림은 아마도 영원할 것이다. 이런 오해는 자신이 바르게 살고 있다고 믿거나, 그래도 비교적 생각이 똑바로 박힌 인간이라고 믿을수록 더욱 심각하고 견고하다. 그 결과 반드시 상대 탓을 하게 된다. "너 때문이야!"
셋째, 꾹 참았던 것은 그때 그때 해결하지 않으면 반드시 터져 나온다. 자루 속의 송곳과 같다.
어르신을 보며 품어왔던 고까운 마음과, 꼬장꼬장한 노인들에 대해 참았던 불만과 편견이 응축되어 터져 나온 것이 이날의 치졸한 사건이다. 나는 항상 참는 것이 화근이었다. 쌓이고 쌓여서 터져 나오면 서로가 당황스럽다. 참을 인자 3개를 강조했던 교육 덕분일까? 나는 솔직하기보다는 자신을 속이는 데 길이 들어 있었다. 그 결과 겨우 신문 하나 달라한 것인데 거기에다 앙갚음을 한 것이다.
소소한 일상생활 속에서 부딪칠 때마다 당연히 양보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다. 심지어 반성도 하지 않는다. 내가 분명히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아가 마음에 넣어놓고 단단히 벼른다. 잊지 말고 다음 기회에 다시 붙어 봅시다, 뭐 이런... 아, 인간은 얼마나 치졸하고 야비한가, 그리고 유치한가.
이 나이가 되어도 내 인생은 아직도 소란하다. 수많은 사람과 복잡하게 엮이며 머리 쥐어뜯을 일이 생기곤 한다. 그 이유를 알 만하다. 나는 그래야 나를 돌아볼 수가 있다. 그래야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가당착적인 믿음이 무너질 수 있다. 내가 만든 허상의 자아에 속지 않고 솔직하게 나를 볼 수가 있다. 경상도 사람이 사생결단하고 싸울 때가 있다. "오늘, 니죽고 내 죽고 같이 죽자~" 그러고 덤빈다. 죽을 지경이 아니면 사람이 변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나의 밑바닥을 보는 일은 괴롭지만 기쁘고 감사하다.
미워하고 후회하고, 또 미워하고 남 탓을 하고 또 후회하고... 어쩌면 이런 것이 윤회가 아닐까. 돌아도 돌아도 같은 자리, 같은 모습, 같은 일상... 과연 나의 윤회는 멈출 수 있을까? 싹 뜯어고쳐진 새로운 나, 새로운 삶을 만날 수 있는 것일까?
물론이다. 그러라고 이 많은 사람과 이 많은 사건들을 만나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