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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냉이꽃 Sep 25. 2019

부러움에 대한 명상

너처럼 살고 싶은 마음, 마음수련 명상으로 버렸다


대학시절이었다. 남학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여학생이 있었다. 음악과 신입생이었다. 입학식 하던 날 쓰러져서 누가 업고 뛰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포인트는 그녀가 가벼웠다는 점이다. 이 소문은 뭇 남학생들의 보호본능을 일으켰다. 


70년대 말의 대학은 그랬다. 여성스러움을 강요하는 통념에 거부반응을 보였던 여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수도권 여대생들은 저항의 표시로 담배를 꼬나 물기도 했다. 행색은 티셔츠나 남방에 면바지를 입고 투박한 랜드로바를 신고 다녔다. 오빠라는 말이 낯간지러워 형이라 불렀다. 껄렁거리며 소주도 같이 마시면서 여성성보다는 성평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 시절에 그녀는 긴 머리에 연한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하얗고 작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녀가 멘 가방의 끈조차도 가냘펐다. 게다가 하얀 손가락은 악보 책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들의 로망이었다. 


여리여리한 분홍색 원피스는 그녀의 모든 것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줬다. 그러나 만일 나에게 그 원피스를 입으라 했다면 어땠을까. 드러내기보다는 감출 곳이 더 많은 나의 몸뚱이를 원망하며 죽고 싶지 않았을까. 그녀를 드라마 주인공처럼 보이게 했던 작고 하얀 운동화를 나에게 신으라 했다면 어땠을까. 내 발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울며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흡족한 것들이 나에게는 고통과 비참이 될 수도 있었다.


부러움만큼 부질없는 감정이 있을까


선선한 아침 공기가 너무 좋아 잠시 걷고 있었다. 지팡이에 의지해 온 힘을 다해 걸어오시던 어르신이 말을 건넨다. "선생님, 걷는 모습이 너무 이뻐서 탐이 나네요." 어르신은 편마비가 오신 분이었다. 온 힘을 다해도 걸음은 뒤틀린다. 그러니 아침 햇살 받으며 자유롭게 걷는 모습은 마냥 부럽고 좋아 보였을 것이다. 아무렴 늙은 내가 이쁠리야.


그렇듯이 나도 많은 사람의 많은 것이 부러웠다. 부러운 것은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도달할 수 없는 꿈이었다. 잘못된 꿈의 결과는 이랬다. 항상 열패감에 시달리고, 자신을 비하하고 부정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잘못된 삶의 태도임을 깨닫는데 수십 년이 걸렸다. 


부러운 것이 있을 때, 나는 자신을 괴롭혔다


나는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었다. 부모가 엄격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자기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이기도 했다. 위선적이었던 양친처럼 나 역시 자신의 결함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해해야 하고, 용서해야 하고, 품어야 하고, 웃어야 하고, 참아야 하고, 극복해야 하고, 못나 보이면 안 되고, 못되게 보여도 안되고, 하고 하고 하고 되고 되고... 할 것과 될 것이 정말 많았다. 


그러나 그건 나의 희망사항이었다. 그런 희망을 갖도록 부추긴 것은 동서고금의 현자들이 쓰신 책이기도 했다. 그분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읽는 나는 문제였다. 노력도 없이 나의 결심만으로 그분들이 설파한 인격이 얻어질 거라 믿은 것이다. 그런 인격이 형성되면 소소한 부러움은 사라지고 행복할 것이라 기대했다. 사람을 쉽게 본, 아니 사람에 대해 무지했던 결과라 할까. 


프로이트를 비판했던 심리학자 칼 융도 말했다. 인간의 심리는 풀리지 않는 퍼즐이고, 당혹스러운 수수께끼이며, 거대한 비밀이라고. 나는 인간에 대해, 아니 나에 대해 공부를 해야 했다. 


마음수련 명상을 하다


자아성찰이라는 말은 좀 거창하다. 그냥 내가 살아왔던 것을 돌아봤다. 자기를 돌아보는 마음수련 명상이다. 자라면서 봤던 부모의 모습, 저렇게 살지 않겠다 하면서 마음에 새겨놓았던 것,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교육받았던 것들, 죄책감, 열등감, 수치심, 불안감... 그런 것들이 나의 마음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아름답게 살려고 노력은 했지만 정작 내 안에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늘 남의 것을 부러워 하고 베껴왔기 때문이다. 


나는 숱한 마음을 비워나갔다. 쉽지는 않지만 빼기 방법이 있어서 가능했다. 마음의 실체가 허상이라는 것을 알면 마음은 버려졌다. 덕분에 나를 가두어 놓았던 위선의 껍질을 많이 벗었다. 억압이 사라지면서 폐쇄공포증 같은 장애도 저절로 사라졌다. 나에게 시기 질투가 얼마나 많은지도 알게 되었다. 물론 자존심 같은 마음은 버려지는데는 참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그 결과 다 버려진 건 아니지만 나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졌다. 자신에게 솔직해진 만큼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두려움이 사라졌다. 인간에 대해 이해가 생긴 만큼 나의 치부 앞에서도 많이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해방감이 느껴졌다. 마음수련 명상을 했던 102세의 할머니는 해방되던 날보다 더 기뻤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유관순과 서대문 형무소에 같이 있었다던 분이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만 해도 마음의 굴레로부터 많이 벗어나 지기는 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 마음이 지워지면 기쁘고 자유롭다. 지워지고 남은 그 자리가 번뇌의 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자아실현의 전제조건이 자아성찰이다


나의 행복을 위해 내가 한 일은 무엇일까. 자기만의 인생을 살 수 없도록 가로막는 장애물을 가득 만든 일뿐이었다. 실컷 만들어 놓고 버리느라 애를 썼다.


참다운 자기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현주소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덧씌운 가면을 벗어야 한다. 그 가면은 자기가 가진 것을 부끄러워 하고 남의 것을 부러워하며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사람이 자신을 알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가장 가까운 것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모습은 드러난다. 그래서 세상을 거울이라 하는 것이다. 


법륜스님도 이렇게 가르쳤다. "한 명이 꼴 보기 싫으면 네 수행의 대상으로 삼아라. 둘이 동시에 꼴 보기 싫으면 내가 병인 줄 알아라. 세명이 동시에 꼴 보기 싫으면 병원에 빨리 가라."


인간에게 가장 낯선 것이 인간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아주 조금밖에 모르거나 막연하게 안다.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을 나라고 믿는다면 큰 오산이다. 그 가면은 나의 삶을 지배하고 나의 본성을 실종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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