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냉이꽃 Jan 08. 2018

수리남의 족쇄


네델란드 식민지였던 수리남 이야기


1667년 영국과 네델란드는 브레다 조약을 체결한다. 그 결과 남아메리카의 수리남은 네델란드의 식민지가 되었다. 17세기 네델란드 노예 상인들은 아프리카 등지에서 많은 노예들을 사거나 붙잡아 수리남으로 데려왔다. 유럽인들이 먹는 설탕을 위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그들은 돌절구에 손가락을 찧으면 손이 잘리고 달아나다 붙잡히면 다리를 잘렸다. 그리고 1863년 노예 해방이 되었고 1954년 네델란드와 동등한 자치국으로 인정받았으며 1975년 분리 독립했으며 이때  수리남 인구의 절반이 네델란드 시민권을 선택했다 한다. 



De wapens van Suriname, Bernard Picart, 1720  두 인디언이 지키고 있는 수리남의 방패에는 노예선이 그려져 있다.


식민지 시절 수리남에 악명 높은 농장주 부인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녀는 남편의 눈길을 끄는 여자 노예 알리다가 못마땅했다. 그녀는 알리다의 한쪽 가슴을 잘라 남편의 식탁에 올렸고, 알리다는 죽고 말았다.  이 소문이 퍼지자 농장을 탈출하는 노예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알리다는 흑인 여성 노예의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농장을 탈출해 정글 속으로 들어간 수리남 사람들은 전통 아프리카 방식의 삶을 살았다. 이들은 마룬이라고 불려졌다. 마룬은 식민지 시절 수리남 전체 인구의 15%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들은 아직도 부시 니그로란 이름으로 정글 속에 살고 있다.


Marrons, Roland Napoleon Bonaparte(프랑스 왕자), 1883 - 1884


그래서 수리남은 행복해졌을까


네델란드는 지금도 수리남의 국경일이 되면 국경일 페스티벌을 성대히 연다고 한다. 수리남에 대한 사죄의 의미이기도 하다. 가장 큰 규모의 페스티벌이 열리는 암스테르담 공원에는 노예 추념비가 있다. 또 박물관에는 만 명이 넘는 노예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다. 


수리남은 우리에게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작은 나라였다. 마치 코리아를 아무도 몰랐듯이. 그러나 그들은 네델란드에 속해 있으면서 6.25 전쟁에도 참전했다. 우리가 몰랐을 뿐 우리와 무관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 나라는 지금도 끊임없는 쿠데타와 부패에 시달리고 있다. 아니 우리 생각보다 훨씬 심각할지도 모른다. 이 나라의 지식인은 유학을 떠나 버리고 남겨진 사람들은 남미의 가난하고 작은 나라에서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수리남 농장의 족쇄를 보며


이 족쇄는 수리남의 파라강 유역의 Overtoom 농장에서 나온 것이다. 노예제 폐지 당시 이 농장에는 193명의 노예가 있었다 전한다. 이동은 물론 탈출을 막거나 형벌을 줄 때 이 족쇄가 사용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지금 이 족쇄는 암스테르담의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고 더 이상 이러한 족쇄로 자유를 빼앗기는 일은 없다. 


이 족쇄가 나에게 낯설지 않은 것은 우리 또한 말 못 할 역사의 질곡을 견디어 왔기 때문이다.  가본 적도 없는 수리남의 짧은 역사를 읽고도 이리 마음이 쓰이는 것은 자유롭지 못한 고통과 불행을 나도 조금은 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살려고 태어난 것일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Slave shackle, anonymous, 1700 - 1899



나에게도 족쇄는 있었다


우리 세대는 20대를 힘들게 보냈다.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고 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긴급조치와 유신정치가 있었던 그 긴 세월이었다. 크고 작은 일로 리스트에 오른 사람에게는 영화같은 일들이 항상 일어나고 있었다. 답답하고 갑갑했던 시절이었다. 처음으로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돌아보고 돌아봤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어린 시절 몇 개의 심리적 억압의 고리가 찾아지면서 아! 하는 탄성이 마음에서 터졌다. 그리고 불가항력의 공포감이 녹아버렸다. 나는 마음의 노예였고 내가 살았던 곳은 마음의 감옥이었다. 그 고통은 묻어두고 외면했던 두려움과 죄의식의 반란같은 것이었다.



나는 살기 위해 명상을 해야 했다.


심리적 장애 하나가 해결되었다 해서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급한 불이 꺼졌을 뿐 시작에 불과했다. 긴 시간이 걸려 졸업을 하고 원하는 직장에도 갔지만 푸른 하늘 은하수에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항해를 하고 있었다. 인생이 너무 어렵고 삶이 너무 모호했으며 물어볼 곳도 없고 알려주지도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와 좌절과 상처만 남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길을 찾고 또 찾다가 찾았다. 못 먹고 못살아서도 아니고 대충 뭉개고 사는 법을 몰라서도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걸어야 할 길을 걷고 싶었다. 그래서 눈을 감고 내가 살아온 바를 되짚어 볼 수 있는 마음수련 명상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수련 명상을 하게 된 첫 날 첫 시간 알게 되었다. 나는 인간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 불나방처럼 뛰어 들기만 했다는 것. 내 인생은 식민지처럼 남의 삶을 대신 사는 것이었고, 조금씩 나아지는 삶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항상 안고 있었다는 것. 나에게는 마음이라는 수많은 족쇄가 존재했다는 것, 단 한번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