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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냉이꽃 Jul 19. 2018

보잘것없고 별 볼 일 없는 내가
마음에 품은 것들

불편했던 천재, 빈센트 반 고흐



밀밭에서 총성이 울렸던 1890년의 7월, 37세의 빈센트 반 고흐는 붓을 놓았다.

그리고 한 세기가 훨씬 지났지만 고흐는 풀지 못한 숙제처럼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그는 단 한 번도 위로받지 못했고 이해받지 못했다. 가족들은 그를 외면했고 동네 사람들은 그를 기피했으며 건달들은 그를 괴롭혔다. 그의 유일한 후원자인 동생 테오가 있었고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가셰 박사가 있었지만 살아생전 단 1점의 그림을 헐값에 판 것이 전부였다.


고흐에게는 사람과 그림이 전부였다. 풍경화도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는 해가 뜨면 화구를 챙겨 나가고 해가 질 때까지 그림만 그렸다. 그를 미치광이로 알려지게 만든 사건들은 아직도 의혹 속에 있다. 그는 귀도 자신이 자른 것이라 했고 총도 자신이 쏘았다 했다. 능히 그렇게 말할 사람이었고 모든 걸 자신이 안고 갈 사람이라 여겨진다. 진위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이제 그의 삶과 그림은 상처받은 숱한 이의 위로가 되고 있다. 현대 미술사 맥락은 몰라도 좋다. 진정성에 목말라 있는 거짓의 시대에 고흐는 뜨거운 물처럼 가슴에 스며든다. 


돈 맥클린 ( Don McLean 1945~)은 1971년 <빈센트>란 서정적인 추모곡을 발표했다.

'이 세상은 당신처럼 아름다운 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가사를 그는 썼다.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고, 들을 줄도 몰랐던, 여전히 듣지 않는 그에 대해 나도 한 번은 돌아보고 싶었다.


나는 그의 삶을 따라가며 작품을 찾았다. 그는 평생을 목이 말랐던 사람이고 모든 것을 흡수했다. 네델란드의 메멘토 모리는 고흐에게도 정신적 토양이 된다. 그는 밀레의 그림에 평생 감동했고, 들라크루아의 강렬함에 매료되었으며, 파리의 인상파를 만나면 그도 찬란하게 부서지는 빛을 그렸다. 


원본에 충실한 작품을 올리기 위해 네델란드 고흐 미술관의 오리지널 작품사진을 다운받았다. 연대나 지명도 고흐 미술관의 자료에 근거한다. 작품 제목 또한 원문을 충실하게 올린다. 유명 작품이 많이 빠져 있지만 덜 알려진 작품을 더러 보게 되는 행운도 있으리라.



1. 1853년, 죽은 형의 이름으로 생을 시작하다


빈센트 반 고흐 (1853.3.30~1890.7.29)

그의 양친은 앞서 죽은 아기의 이름을 그에게 붙여줬다. 그의 존재는 처음부터 외면받았고 슬픔과 불행도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그는 무슨 이유인지 학교를 그만두었고 16살 되던 해,  헤이그의 구필화랑에서 일한다. 런던에 있는 동안은 대영박물관 등에서 농민화가 밀레의 그림에 빠졌고 밀레에 관한 모든 것을 읽었다. 1875년 파리로 전근을 가게 되고 이 시기에 종교적 열정이 생겼다 한다. 화랑에서의 잦은 논쟁과 첫사랑의 실패, 정신질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1876년 23세에 화랑에서 해고되었다. 그리고 성직을 선택한다.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성장했던 그는 벨기에 탄광촌 보르나주에서 평신도 전도사로 일했다. 매주 대여섯 명이 죽어 나가는 그곳에서 그는 광부의 옷을 입고 함께 일하고 가진 것을 나눠 먹었다. 아픈 사람을 방문했고 성경을 읽어주며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 존재를 던졌지만 교단은 유별난 그를 해고한다. 27세 되던 해, 악명 높은 탄광지대인 보르나주를 떠나 브뤼셀에서 그림을 시작하게 된다. 


내 생활이 더 보잘것없게 되면서 삶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비관적인 생각에 젖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너와 함께 보낸 시간 덕분에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고 유쾌한 기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인 것 같다.

네가 떠난 후 밤거리를 걸어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와 초상화를 그렸다. 

1879년 8월 15일 테오에게


너는 나에게 이방인이 되어 버렸고 나도 어쩌면 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너에게 이방인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나는 보리나주로 돌아왔다.

나의 최종 목표가 뭐냐고 너는 묻고 싶겠지. 초벌 그림이 스케치가 되고 스케치가 유화가 되듯이 최초의 모호한 생각을 다듬어감에 따라, 최초의 덧없이 지나가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감에 따라 그 목표는 더 명확해질 것이고 느리지만 확실하게 성취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네 영혼 안에도 거대한 불길이 치솟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누구도 그 불을 쬐러 오지는 않을 것이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곤 굴뚝에서 나오는 가녀린 연기뿐이거든.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힘을 다해 내부의 불을 지키면서, 누군가 그 불 옆에 와서 앉았다가 계속 머무르게 될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려야 할까.

그래서 이렇게 묻곤 한다. 신이여, 이 상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요? 언제까지 이래야 합니까?

1880년 7월. 테오에게




1. 빈센트의 양친: Theodorus van Gogh and Anna van Gogh-Carbentus
2. 13살의 빈센트 
3. 19살의 빈센트
4. 동생 Theo van Gogh (1857-1891)
5. 네델란드 준데르트의 고흐 생가
6. Open Barn and Farmhouse, Vincent van Gogh, February 1864 (고흐가 11세 때 그린 스케치)



2. 1881, 헤이그 시절


빈센트의 부모는 장남이 예술가의 삶을 선택한 것에 실망한다. 그는 가족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유일한 후원자이자 그림에 집중하길 권했던 동생 테오의 도움을 받으며 그림을 시작한다. 


외사촌이자 헤이그 화파의 거장이었던 안톤 모베( Anton Mauve, 1838 - 1888)는 그에게 그림을 지도했다. 그는 수채화와 유화의 기초를 가르쳤고 헤이그 도시 풍경을 그리도록 하여 기초를 다져줬다. 잦은 마찰이 있기는 했으나 모베와 결별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시엔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오늘 모베를 만나 아주 유감스런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그와는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모베는 쫒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빨리 가버렸다. 내가 쫒아가길 원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모래 언덕에서 헤어지기 직전에 그가 "자네는 타락했어"라고 했다. 나는 돌아서서 혼자 집까지 걸어왔다.

1982년 5월 3일-12일. 테오에게




1. Donkey Stand on the Beach at Scheveningen, Anton Mauve, c. 1876 (모베의 그림)
2. 안톤 모베의 초상화, Willem Witsen, c. 1885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3. Donkey and Cart, Etten, Vincent van Gogh, October 1881 (28세 때의 그림이다.)
4.  Bridge and Houses on the Corner of Herengracht-Prinsessegracht, The Hague,1882  (안톤 모베가 고흐에게 그리게 한 헤이그의 도시 풍경 12점 가운데 하나이다.)
5.  Country Road, Vincent van Gogh, The Hague, March-April 1882
6.  Pollard Willow, Vincent van Gogh, The Hague, July 1882



3. 그녀, 시엔


1882년 1월, 겨울 길바닥에서 임신하고 병든 매춘부를 만난다. 5살 된 딸이 딸린 시엔이다. 가족들은 충격에 빠졌고 테오도 반대했다. 그러나 빈센트는 그녀를 돌보기로 하고 스튜디오를 빌렸다.

그녀와 아이들을 배고픔과 추위에서 구하고 싶었고 그들은 행복했다. 시엔의 출산을 누구보다 기뻐했고 시엔은 비둘기처럼 고흐를 따랐다. 테오는 생활비를 보내지 않았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1893년 9월, 시엔은 결국 매춘부의 생활로 돌아간다. 고흐에게는 가족을 버린 자책감과 상처와 성병이 남았고, 시엔은 1904년 로테르담 바다에 투신한다. 


예절과 교양을 숭배하는 너희 신사들에게 물어보고 싶구나. 한 여자를 저버리는 일과 버림받은 여자를 돌보는 일 중 어떤 쪽이 더 교양있고 더 자상하고 남자다운 자세냐?

지난 겨울, 임신한 한 여자를 알게 되었다. 남자한테서 버림받은 여자지. 겨울에 길을 헤매고 있는 임신한 여자... 그녀는 빵을 먹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얻었는지는 상상할 수 있겠지.

다른 여자가 내 가슴을 뛰게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녀는 멀리 떠나 버렸고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자, 병들고 임신한 데다 배고픈 여자가 한 겨울에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달리 행동할 수 없었다.

1882년 5월 3일 ~12일. 테오에게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고 있다.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주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만하게 해주는 힘이 아니겠니. 비록 그녀가 케이처럼 우아하지도 않고 예절도 잘 모르지만 선의와 헌신으로 가득 차 있어서 나를 감동시킨다.

1882년 6월 1일~2일. 테오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에 나는 무엇일까. 아무도 아니다.

별 볼 일 없고 유쾌하지  않은 사람
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절대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 없는 사람
한마디로 바닥 중의 바닥

이 모든 말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
이 보잘것없고 별 볼 일 없는 내가
마음에 품은 것들을 

 1882년 7월 21일. 영화 <러빙 빈센트, 2017년 개봉 > 중에서




< 1882년-1883년, 헤이그에서 그린 고흐의 가족 >
시엔과 시엔의 딸, 시엔이 낳은 갖난아기, 그들의 보금자리, 고흐의 행복을 그린 그림이다. 그는 진심으로 시엔을 사랑했다.
1.  Sorrow, November 1882
2.  Head of a Woman,  December 1882-January 1883
3.  Head of a Woman,  December 1882-January 1883 
4.  Cradle with Child by the Stove, 21 July 1882
5.  Girl Kneeling by a Cradle,  March 1883 
6.  Woman with a Child on her Lap,  March 1883



헤이그 시절의 작품


늙고 가난한 사람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스(19C 네덜란드 화가)가 그들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그려냈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드물다는 게 이상하다. 여기 헤이그에는 매일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세계가 존재한다.

1883년 3월 21일~28일. 테오에게


그는 밀레를 좋아한 만큼 네델란드의 밀레라 불리어지는 요제프 이스라엘스(1824-1911)를 좋아했다. 이스라엘스 또한 밀레의 그림이 이정표가 되었던 화가이다. 이스라엘스는 가난하고 소박하며 낮고 조용한 노래같은 그림을 그렸다.



1. The Sower (after Millet) Vincent van Gogh, Etten, April 1881
2. Worn Out, Vincent van Gogh, The Hague, November 1882 
3. Girl with a Shawl, Gogh, The Hague, December 1882-January (시엔의 딸)  



4. 뇌넨, 아버지의 집으로 가다.


시엔과 결별한 고흐는 호헤벤과 니암스테르담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다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다. 1983년 12월, 다시 아버지의 집 뇌넨으로 간다. 뇌넨은 2년 간 머물렀던 곳이며 부친의 마지막 부임지였다. 그곳은 농부들과 시골 노동자들을 그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84년 1월, 테오에게 생활비 대신 작품을 보내겠다 제안한다. 물론 테오가 받은 빈센트의 그림은 파리 시장에서 팔리지 않았다.


내가 개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 개는 한때 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그를 길거리로 내쫓은 사람은 아버지다. 너무 오래 쫓겨나 있던 개는 더 사나워졌다. 
개는 이곳에 돌아온 걸 후회한다. 황야를 떠돌 때도 이 집에서처럼 외롭지는 않았다. 

1883년 12월 15일. 테오에게




1. Weaver, with a Baby in a High Chair, Vincent van Gogh, Nuenen, January 1884
2. Pollard Birches, Vincent van Gogh, Nuenen, March 1884
3. Road behind the Parsonage Garden in Nuenen, Gogh, 1884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1885년 감자 먹는 사람들


85년 3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빈센트는 집을 떠나 스튜디오로 옮긴다. 그리고 테오의 생일에 맞춰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내고 싶어 했다.


나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민 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다. 그 손은,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암시하고 있다.

언젠가는 <감자 먹는 사람들>이 진정한 농촌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농부의 삶을 담은 그림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세련되게 그리는 것은 잘못이다.

밀레나 드그루 같은 화가들이 "더럽다, 저속하다, 추악하다, 악취가 난다" 등등의 빈정거림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준히 작업하는 모범을 보였는데, 내가 그런 악평에 흔들린다면 치욕이 될 것이다.

농부를 그리려면 자신이 농부인 것처럼 그려야 할 것이고, 농부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며 그려야 할 것이다. 실제로 자신이 누구인가는 잊어야 한다.

1885년 4월 30일. 테오에게




1. Peasant Family at the Table, Jozef Israëls , 1882
2. De aardappeleters, Vincent van Gogh, 1885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3. The Potato Eaters, Nuenen, April-May 1885 ( 황금빛이나 구릿빛 배경에 그림을 걸고 절대 검은 곳에 걸지 마라 신신당부했다. 고흐는 이 작품에 심혈을 기울였다.)



5. 1885년 연말, 인상파가 있는 파리로 가다


1884년 여름, 열 살 연상의 마르고트를 사랑하게 되나 양가 가족의 반대에 부딪치고 그녀는 발작하고 만다. 고흐는 뇌넨을 떠나 파리로 온다. 


요즘은 온통 램브란트와 프란츠 할스 생각뿐이다. 그 시대를 생각하게 하는 사람을 이곳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오랫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탓에 네가 보내준 돈을 받았을 때는 어떤 음식도 소화시킬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내가 돈을 받을 때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비록 그동안 밥을 못 먹고 있었지만,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그림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이 손에 들어온 즉시 모델을 구하러 나가서는 돈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작업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농촌 아낙을 그릴 때는 농촌 아낙답게, 매춘부를 그릴 때는 매춘부답게 표현) 그리는 법을 알아내고 싶다. 마네는 그렇게 하는 데 성공했다. 쿠르베도 그랬고. 아, 망할 자식들! 나도 같은 야망이 있다.

1885년 12월 28일. 테오에게


파리 구피 미술상의 매니저였던 테오는 모네의 작품을 소개했다. 빈센트는 로트렉을 만났으며 버나드를 만났고 쇠라의 점묘법을 만난다. 파리의 인상파 화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던져준 일본 목판화 우케요에를 테오와 함께 수집하기도 했다. 또한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탕기 영감을 만났다. 어두운 그의 그림은 몽마르트 언덕처럼 밝게 변한다. 


진정한 화가는 양심의 인도를 받는다. 화가의 영혼과 지성이 붓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붓이 그의 영혼과 지성을 위해 존재한다.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그를 두려워한다.

1885년, 파리에서. 테오에게



1. Head of a Skeleton with a Burning Cigarette, Gogh,  Antwerp, January-February 1886
2. View from Vincent's Studio, Vincent van Gogh , Paris, June 1886
3. Vase with Gladioli and Chinese Asters, Gogh, Paris, August-September 1886
4. Vincent van Gogh, John Peter Russell (1858 - 1930), Paris, 1886 : 파리에서 만난 후기 인상파 화가 존 피터 러셀이 그린 고흐 초상화이다.
5. Torso of Venus, Vincent van Gogh , Paris, June 1886 :고흐는 모델료를 지불할 돈이 없었다. 모델 대신 자화상을 그리고 토르소 연작을 그렸다. 토르소는 모두 코발트빛 배경으로 그려진다.
6. Self-Portrait with Pipe , Vincent van Gogh, Paris, September-November 1886


점묘파의 영향을 받은 파리 시절의 그림



1. Boulevard de Clichy, Vincent van Gogh, Paris, March-April 1887
2. Plaster Cast of a Woman's Torso, Vincent van Gogh, Paris, February-March 1887
3. Garden with Courting Couples, Square Saint-Pierre, Vincent van Gogh, Paris, May 1887
4. Self-Portrait, Vincent van Gogh , Paris, March-June 1887
5. The Bridge at Courbevoie, Vincent van Gogh, Paris, May-July 1887 (파리 센느강의 풍경)


파리 시절의 자화상



1. Self-portrait, Vincent van Gogh, 1887 (파리 로댕미술관 소장)
2. Self-Portrait with Grey Felt Hat , Vincent van Gogh, Paris, September-October 1887
3. Self-Portrait as a Painter, Vincent van Gogh, Paris, December 1887-February 1888 


물감을 팔았던 탕기 영감


고흐가 그린 3장의 탕기 영감 그림 중 세 번째 그림이다. 탕기는 파리의 가난한 화가들에게 인심 좋은 물감상이었다. 그리고 고흐의 천재성을 아껴준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이 그림도 고흐가 물감 값을 대신하여 준 것이다. 이후 조각가 로댕이 탕기 영감의 딸로부터 이 그림을 구입하였고 지금은 파리 로댕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 인상파 화가들이 매료되었던 일본 우키요에 판화들이 이 초상화의 배경에 가득하다. 그 화려함 속에서도 탕기 영감은 시선을 뺏기지 않는다. 


그는 모든 감정을 느꼈다. 가엾은 빈센트! 너무 많이 느꼈다. 

페르 탕기,  영화 <러빙 빈센트, 2017> 중에서


 Père Tanguy(1825-94) , Vincent van Gogh,1887. 파리 로댕 미술관 소장 



6. 1888년, 태양이 눈부신 아를로 오다



빈센트는 퇴폐적인 파리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다. 많은 예술가에게 파리는 종착역이지만 빈센트는 자신의 길을 떠났다. 그는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에서 더 많은 색과 더 많은 빛, 그리고 시골의 평화를 찾고 싶었다. 1888년 2월 21일, 론강의 작은 마을 아를에 도착했다. 그는 아를의 과수원과 꽃을 그렸고 해안으로 여행을 갔으며 바다도 그렸다. 그는 밝고 풍성해졌다. 


고흐는 6월부터 아를의 밀밭을 그리기 시작한다.  밀레의 그림을 수없이 스케치하였고 일하는 농부들을 수없이 보고 그렸다. 그들의 굵은 손마디며 허리 숙인 그들의 노동을 말이다. 밀레나 고흐의 밀밭은 경건하다. 우체국장 조셉 룰랭은 고흐를  '바라볼 수는 있지만 이해할 수는 없는 친구'라고 회상했다.  


나는 북부지방에 있을 때보다 잘 지내고 있네. 그늘이 전혀 없는 한낮의 밀밭에서 작업하는 게 매미처럼 즐겁네. 35살이 되어서가 아니라 25살이었을 때 이곳에 올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그 당시 나는 회색이나 색이 없는 것에 빠져 있었네. 늘 밀레를 꿈꾸었고 모베나 이스라엘스 같은 네델란드 화가들과 사귀곤 했지.

1888년 6월 18일. 베르나르에게


<수확>을 그리는 동안 밭에서 직접 수확을 하고 있는 농부보다 결코 편하지 않은 생활을 했다. 
1888년 7월. 테오에게




1. The Langlois Bridge, Gogh, Arles, March 1888 (랑글루아 다리는 지금 반 고흐의 다리로 불림)
2. The White Orchard, Vincent van Gogh, Arles, April 1888
3. Seascape near Les Saintes-Maries-de-la-Mer, Gogh, Arles, June 1888 (아를에서 7시간 거리의 지중해 여행에서 바다를 보고 그린 그림이다.)
4. The Zouave, Vincent van Gogh, Arles, June 1888 
5. The Harvest(수확) , Vincent van Gogh, Arles, June 1888



7. 1888년 10월 23일, 노란 집에서 고갱을 맞이하다



사실 네가 브르타뉴에 있는 그에게(고갱) 생활비를 보내면서 프로방스에 있는 나에게도 생활비를 보내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 두 사람이 250프랑을 나눠 쓴다면 누구보다 네가 편해질테고, 게다가 내 그림 뿐 아니라 고갱의 그림도 얻게 되겠지.

나 혼자 그렇게 많은 돈을 쓴다는 게 가슴 아프다. 그걸 해결하려면 함께 살 여자를 찾든지 그림을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는 친구를 찾아야겠지. 나는 여자를 찾지 않고 친구를 찾는다. 테오야 이건 화가 공동체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1988년 5월~6월. 테오에게



해바라기


고갱과 함께 우리들의 작업실에서 살게 된다고 생각하니 작업실을 장식하고 싶어졌거든. 오직 커다란 해바라기로만. 네 가게 옆에 있는 레스토랑이 아주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는 걸 너도 알겠지. 나는 그곳 창문에 있던 커다란 해바라기를 늘 기억하고 있다.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면 열두 점 정도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 그림을 모두 모아 놓으면 파란색과 노란색의 심포니를 이루겠지.
매일 아침 해가 뜨자마자 그림을 그리고 있다. 꽃은 빨리 시들어버리는 데다 단번에 전체를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1988년 8월. 테오에게



< 해바라기 Sunflowers 연작>
1. 1888년 9월, 필라델피아 미술관
2. 1888년,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3. 1888년, 일본 도쿄 신주쿠도 고세이지 미술관
4. 1888년, 독일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미술관
5. 1889년 1월, Arles, 암스테르담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작품 사진 : https://www.vangoghmuseum.nl/en/news-and-press/news/virtual-sunflower-360-gallery




1. The Yellow House (The Street), Vincent van Gogh, Arles, September 1888  (고갱을 위해 빌린 노란집이다. 고흐는 공동체에 대한 생각이 절박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귀를 잘랐고 화가공동체에 대한 꿈은 좌절한다. )
2. The Bedroom, Vincent van Gogh , Arles, October 1888
3.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Gogh, Arles, January 1889


고갱은 고흐와 함께 살았던 처음이자 마지막 화가이다. 고흐는 함께할 예술가를 위해 노란집의 4개의 방을 빌렸다. 그러나 고갱과 고흐는 매우 달랐고 그래서 싸웠다. " 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좋아한다. 그걸 다시 구성하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1888년 6월.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라는 말은 고흐와 고갱의 차이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다.


고갱은 아를이라는 훌륭한 도시, 우리가 작업하고 있는 작고 노란집,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조금 싫증이 난 것 같다. 그 원인은 다른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게 있다. 그는 그냥 떠나버리거나 머무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묵묵히 그의 결정을 기다리겠다.

1888년 12월 23일. 


이 편지를 쓴 날, 긴장이 극으로 치달아 사고가 났고 밤 11시 30분에 매춘부 라첼에게 자른 귀볼을 싼 종이를 건네줬다. 고흐가 귀를 자르면서 노란집의 꿈은 깨어졌다. 89년 1월 퇴원했지만 발작을 두려워 했던 빈센트는 그해 5월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는 발작을 해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8. 1889년 5월 8일, 생레미 생폴 정신병원으로 스스로 가다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기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그럴 때 묻곤 하지. 왜 프랑스 지도 위에 표시된 검은 점에게 가듯 창공에서 반짝 이는 저 별에게 갈 수 없는 것일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증기선이나 합승 마차, 철도 등이 지상의 운송수단이라면 콜레라, 결석, 결핵, 암 등은 천상의 운송수단인지도 모른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

1888.6 테오에게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 1889.9>라는 그림에 대한 편지


화가의 삶에서 죽음은 아마 별 것 아닐지도 몰라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단언해. 
하지만 별을 볼 때면 언제나 꿈꾸게 돼.
난 스스로에게 말하지. 왜 우린 창공의 불꽃에 접근할 수 없을까. 
혹시 죽음이 우리를 별로 데려가는 걸까?
늙어서 편히 죽으면 저기까지 걸어서 가는 거야
늦었으니까 자러 가야겠어. 잘 자고 행운을 빌께 

악수를 보내며 사랑하는 빈센트/ 영화 <러빙 빈센트, 2017> 중에서


The Starry Night, Gogh, Saint-Rémy-de-Provence, 1889
작품 사진: 뉴욕 현대미술관 https://www.moma.org


이 편지는 그림을 그리다 지쳐서 쉬는 틈틈이 조금씩 쓰고 있다. 요즘은 아프기 며칠 전에 시작한 <수확하는 사람>을 완성하느라 전력을 다하고 있다.

소재는 단순하고 아름답다. 수확하느라 뙤약볕에서 온 힘을 다해 일하고 있는 흐릿한 인물에서 나는 죽음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그러므로 전에 그렸던 <씨 뿌리는 사람>과는 반대되는 그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죽음 속에 슬픔은 없다. 태양이 모든 것을 순수한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환한 대낮에 발생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들라크루아는 "난 이도 다 빠져버리고 숨도 제대로 못 쉴 때가 되어서야 그림을 발견했다"라고 말했는데, 어쩌면 그 연장선상에 있는 어떤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는지도 모르겠다. 내 슬픈 병도 아주 느리긴 하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쉼 없이 열의를 갖고 작업하게 해주거든. 어쩌면 천천히 오래 일한다는 게 숨은 열쇠인지도 모른다. 
사실 나 자신은 어떻게 되든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이(파리의 20인 전을 준비하는 화가들) 나에 대한 걸 다 잊어버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요즘은 내가 아프기 때문에 너무 괴로워해서는 안된다고, 그리고 화가라는 초라한 직업을 흔들림 없이 유지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건강을 위해 정신병원에 좀 더 머물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수확하는 사람>이 끝났다. 자연에 대한 위대한 책처럼 이 그림도 죽음의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이제 막 미소를 지으려는 순간'이다. 보라색으로 그려진 언덕 외에는 모두 창백한 노란색이거나 황금빛을 띤 노란색이다. 병실 철창을 통해 내다본 풍경이 그렇다는 게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1889년 9월 5일-6일. 테오에게


 weatfield with a Reaper, Gogh, Saint-Rémy-de-Provence, September 1889   


빈센트가 사랑한 밀레


전前 시대 그림의 등장인물이 하지 않은 것, 그건 바로 노동이다.
밀레도 일하는 사람을 그렸지. 르미트, 이스라엘스 같은 농촌 화가들 중 상당수가 노동을 다른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했다. 

나는 인물이 아카데미식으로 정확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대상을 변형하고 재구성하고 전환해서 그리는 법을 배우고 싶다. 그 '부정확성'을 배우고 싶다. 그걸 거짓말이라 부르겠다면 그래도 좋다. 그 거짓말은 있는 그대로의 융통성 없는 진실보다 더 '진실한 거짓말'이다.

움직이고 있는 농부의 동작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현대 예술의 진수이고, 그리스에서도, 르네상스 시기에도, 옛 네델란드 화파도 하지 않은 것이다.

1885년 7월. 테오에게


생레미에서 1889년 9월에 그린 밀레 그림 모작
 Vincent van Gogh , Saint-Rémy-de-Provence, September 1889 

1. Peasant Woman Binding Sheaves (after Millet)
2. The Sheaf-Binder (after Millet)
3. The Reaper (after Millet) 
4. The Sheepshearer (after Millet)
5. Thresher (after Millet)
6. The Woodcutter (after Millet) 


테오는 1889년 4월 조한나와 결혼한다. 1890년 1월에 아들이 태어났다. 형의 이름을 따  빈센트 윌렘 반 고흐라는 이름을 지었다.  고흐는 조카의 침실을 위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나는 아몬드 나무 가지를 그려 보낸다.


1. Almond Blossom, Vincent van Gogh, Saint-Rémy-de-Provence, February 1890
2. 테오의 아내  Jo van Gogh and her baby son Vincent Willem.



9.  1890년 5월,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70일


테오는 피사로의 추천을 받아 파리 근교의 작고 조용한 시골마을로 고흐를 데려 온다. 고흐가 마지막 70일을 보냈던 우아즈 강가의 오베르 마을이다. 고흐는 라부 여관 3층 다락방에서 70일 동안 80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화가들을 많이 치료하던 의사 폴 가셰가 여기에 있었다. 아마추어 화가인 가셰는 고흐의 천재성을 부러워하며 그림을 베끼곤 했다 한다.


1. Irises, Gogh, Saint-Rémy-de-Provence, May 1889 ( J. 폴 게티 미술관 ) www.getty.edu
2. Daubigny's Garden, Vincent van Gogh, Auvers-sur-Oise, June 1890  
3. Portrait of Dr Gachet, Vincent van Gogh, Auvers-sur-Oise, June 1890
4. Irises, Vincent van Gogh, Saint-Rémy-de-Provence, May 1890
5. Blue Irises, Ohara Koson, 1900 - 1930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고흐의 아이리스 그림은 네델란드의 메멘토 모리 정신에 기반을 두는 것이지만, 당시 유행했던 일본 회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그건 다른 인상파 화가들도 마찬가지였다.
6. Irises, Tsukioka Kôgyo, 1890 - 1900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1890.7.29


그림을 그린 10년 동안 그는 항상 테오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빈센트의 가장 큰 공포는 자신 때문에 동생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물감이 없으면 종이에 데생을 많이 하면 된다는 편지를 몇 번이나 썼다. 직장에서 힘들어진 테오와 돈문제로 다투고 돌아온 날 빈센트는 <까마귀가 있는 밀밭>을 그렸다. 그의 정처없고 절망적인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흔히 이 밀밭 그림을 유작이라 하지만 네델란드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은 고흐의 마지막 작품을 <나무뿌리>로 최종 확인했다.


1. Landscape at Twilight,  Auvers-sur-Oise, June 1890 
2. Wheatfield under Thunderclouds, Auvers-sur-Oise, July 1890
3. Wheatfield with Crows, Auvers-sur-Oise, July 1890
4. Tree Roots,  Auvers-sur-Oise, July 1890                                                                               


7월 27일, 논란이 많은 권총 사건이 일어났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고흐는 이틀 동안 초라한 다락방에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고통을 견뎠다. "어쩌면 이게 모두를 위한 일이야"라고 했다 전해진다. 29일 새벽 1시 30분 테오의 품에서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라부여관의 가족들과 탕기 영감, 가셰, 베르나르가 이를 지켜보았다. 7월 30일 오베르 마을 공동묘지에 그는 묻힌다. 


테오 반 고흐도 6개월 후 1891년 2월 25일 34세의 나이로 죽는다. 두 개의 심장, 하나의 마음이었다고 평가받는 동생 테오였다. 1914년 테오의 아내는 빈센트 묘비 옆에 나란히 묻어 주었다.


라부 여관에는 그가 숨을 거둔 작은 다락방이 보존되어 있다. 3층 구석의 다락방은 사람이 죽은 곳이라 더 이상 임대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보존이 가능했다. 


아래는 라부 여관의 사진이다. 가운데 여인이 라부 여관의 딸인 아들린 라부다. 그녀는 고흐의 임종을 지킨 몇 사람 중의 한 명이다. 빈센트는 850점의 작품과 1300여 점의 스케치, 그리고 650통의 편지를 유산으로 남겼다. 

모두가 외면했고 불편해했던 빈센트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그리고 거절당했던 그의 그림은 어마어마한 값으로 경매되고 있다.


깊고 텅 빈 외로움에 둘러싸인 그림 속의 별처럼, 외롭게 빛났던 한 사람의 삶이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마을의 라부 여관/ 고흐 형제의 묘비



나는 고흐의 고독한 투쟁과 나의 고뇌 사이에서 연결고리를 발견했으며, 그가 상처 입은 치유자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전에 내가 감히 바라보지 못했던 것을 그렸고, 내가 감히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던 것에 물음을 던졌으며, 내가 감히 근접할 수 없었던 마음의 자리에 성큼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나로 하여금 나의 두려움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고, 내가 사랑이신 하느님을 찾기 위해 더욱 깊이 또 더욱 멀리 나아갈 수 있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헨리 나우웬 (1932-1996, 하버드 교수직을 내려놓고 평생을 장애인 공동체에서 살았던 사제 )

   


마지막으로 Don McLean이 고흐를 추모하며 부른 노래 < Vincent>를 소개한다. 

                                       



1. 고흐의 편지 내용 발췌 :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옮김, 예담, 2004
2. 작품 사진 출처: 암스테르담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로댕 미술관
    https://www.vangoghmuseum.nl/en
    https://www.rijksmuseum.nl/en
    http://www.musee-rodin.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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