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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냉이꽃 Sep 11. 2018

자기를 돌아보는 명상

떨어져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비행기를 탄다. 공항이 멀어져 가고 논밭이 멀어진다. 가족도 사람도 복닥거리던 도시도 점이 되어 멀어진다. 긴 강줄기가 반짝인다. 모든 것은 말이 없다.


익히 알던 대지를 지나면 이름 모를 땅이 나타난다. 땅이 끝나면 푸른 바다가 끝이 없다가 이윽고 그 모든 것은 구름에 가려진다. 흰구름 속에 있으면 높이도 모르겠고 거리도 시간도 속도도 모르겠다. 간다 하니 가는 줄 알지 기류의 변화가 없는 한 비행기는 미동도 느껴지지 않는다. 죽음처럼 모든 것은 정지했다. 


나는 지금 상공을 날고 있다. 





산에만 올라가도 마음은 달라진다. 산 정상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아름답고 조용하다. 한줄기 부는 바람에 울고 웃고 노하던 것들이 훌훌 날아간다. 괜히 싸웠다.. 한 번 깨닫고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꼭 같은 삶 이 되풀이될지라도.


비행기 창문 밖을 본다. 저 구름 아래 내가 발 딛고 살던 땅이 있다. 정확하게는 있다고 기억하는 것이다. 땅의 삶을 기억해 본다. 잊지 못할 얼굴도, 잊고 싶은 얼굴도 지금 여기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만은 용서못해..." 왜 그랬을까. 하늘과 구름은 설명할 수 없는 평화 속에 있는데 나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지구는 광대한 우주의 무대 속에서 하나의 극히 작은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조그만 점의 한 구석의 일시적 지배자가 되려고 장군이나 황제들이 흐르게 했던 유혈의 강을 생각해보라. 또 이 점의 어느 한 구석의 주민들이 거의 구별할 수 없는 다른 한 구석의 주민들에게 자행했던 무수한 잔인한 행위들, 그들은 얼마나 빈번하게 오해를 했고, 서로 죽이려고 얼마나 날뛰고, 얼마나 지독하게 서로 미워했던가 생각해보라.   

<창백한 푸른 점> 칼 세이건, 2001년  





한 60년을 겨우겨우 살고 나니 후회가 많다. 학창 시절은 숙제 걱정을 하고 시험 걱정을 하고 합격자 발표의 공포를 견디며 살았던 것 같다. 그다음은 의무감과 책임감, 뭔가를 해야 하고 이루어야 한다는 짐을 가득 안고 살았다. 그래서 개운하게 웃은 적도 없고 티 없이 즐거웠던 적도 없었다. 늘 근심과 걱정을 업고 다녔다. 그리고 열등감과 무력감은 그림자처럼 붙어서 나를 괴롭혔다. 나는 세상을 탓하다가 어느 날은  "니가 잘못한 거야." 자책했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부모와 환경의 영향도 작진 않겠지만 그 또한 결국은 나의 조건이고 나의 문제다. 자기완성에 대한 욕심과 우월감을 향한 열망.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탁월함을 추구할 때 행복하다."라고 말했다는데 왜 나에게는 족쇄가 된 것일까.


우리의 거만함, 스스로의 중요성에 대한 과신, 우리가 우주에서 어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망상은 이 엷은 빛나는 점의 모습에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우리 행성은 우주의 어둠에 크게 둘러싸인 외로운 티끌 하나에 불과하다. 

<창백한 푸른 점> 칼 세이건, 2001년





수십 년 살다 보니 사람 사는데도 법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움은 미움을 낳았다. 내가 그를 흘겨보면 그도 나를 흘겨봤다. 내가 그를 칭찬하고 좋아하면 누구도 그런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 단지 칭찬이 힘들고 입이 떨어지지 않을 뿐이다. 사람들은 잘난 이를 싫어하고 겸손한 이를 좋아한다. 상대가 허당인걸 알게 되면 대개는 방어막을 풀고 친밀감을 느낀다. 이걸 아는데도 시간이 걸렸지만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참 어려운 노릇이었다. 제대로 몰라서겠지.  TV를 보면 연예인들은 배우지 않아도 솔직하고 그냥 자연스러웠다. 부러웠다. 내가 그들처럼 할 수 없는 것은 자의식이 강해서이다.  어디에서건 내가 중심이 되고 인정받고 싶은 초라한 자존심. 맹세컨데 그건 열등감의 다른 얼굴이고 자신에 대한 무지가 만든 것이다. 얼마나 인정받지 못했으면 그랬을까. 


그는 두 외계인 여행자를 머리끝에서 발 끝까지 쭉 훑어본 후,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 그리고 당신들의 천체, 태양, 별 모두는 오직 인간이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오." 
이 말을 듣자 두 외계인은 서로 몸을 부딪치면서 그칠 줄 모르고 웃었다.   

볼테르의 <미크로메가스: 철학사, 1752>  오직 지구를 위해 우주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지구중심주의자에 대한 역설의 글이다. 칼 세이건의 책에 소개되었다.

     


달의 분지 위로 떠오르는 지구 /아폴로 11호 사진, NASA제공



나 같은 사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명상이다. 너무 혼란스러우면 일을 하다가도 잠시 눈을 감는다. 상황에 끌려가는 것을 멈추기로 결심한 몇 분의 시간이 나를 구원한다.


먼지 같은 작은 별, 그 속에 붙어사는 보이지도 않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의 절반은 나의 반대쪽에 거꾸로 붙어 있다. 그런 내가 꽉 막힌 머리로 고심하며 붙들고 있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 언니, 좀 고만해~" 후배들에게 핀잔 들으면서도  혼자 짓고 부수던 모래성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너무 심각하다. 그 심각함은 도피처이기도 했다. "그래, 이 딴 게 무슨 의미가 있어"라는 논리로 많은 일과 사람을 무시하고 살았다. 불편한 것은 다 무시했다. 그래서 무감각해졌다. 불행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60이 되기 전까지 나는 글도 우습게 여겼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무겁고 우울한 인간이 되어갔다. 

나는 너와는 다르다고 믿었다. 다르고 싶었고 유별나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동네 아이들과 고무줄 뛰기도 원활하게 하지 못했던 나는 오래도록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비관적이고 시비가 많다. 그래서 늘 마음에 적이 많았다. 꼬나보고 째려보는 내가 그들인들 뭐 좋았겠는가.

나는 바라는 마음이 많다. 나는 누구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런 나를 인정해주기 바랬다. 나는 인색한데 누군가 나에게만은 호의를 베풀기 바란다. 어불성설이다. 거지도 아니고... 맞다, 거지다. 거지는 불평이 많다. 

나는 남을 가르치려 든다. 마음이 높아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만 가득 차 있다. 남의 말을 들을 줄 모른다. 듣고 배우는 귀가 막혀 있다. 불행하게도 안 들린다. 대인관계가 삐그덕거리는 건 당연한 결과다.



혼자만 분주할 뿐 누구도 알 바 없는 저 마음들을 하나하나 비워본다. 나를 가로막아 불행을 자초했던 나쁜 마음들을 버리는 것이다. 버리고 나면 자연스럽고 지당하며 온전한 것이 남을 것이다. 그 자리는 불행이 없기에 행복할 것이다. 버리는 방법을 익혀 안다는 건 엄청난 재산이구나 새삼 깨닫는다.


끝이 없는 우주에서 지구는 한 점 먼지에 불과하다. 지금 사라진다면 영원히 잊혀질 작은 별이다. 그 속에 사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엄마는 한 줌 재가 되어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나는 살아서 아무것도 아님을 미리 생각한다. 아무것도 아니므로 내가 함부로 여겼던 세상에서 비켜난다. 세상이 보인다. 그 세상을 딱 버티면서 가렸던 나의 무례함이 부끄럽다.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던 욕심의 장벽이 무너져야 비로소 온전한 세상이 보인다. 


작은 것이 보인다.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이 고마운 세상이 보인다. 황송할 만큼 많은 것을 주고 있어도 생각에 갇혀 있으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 이 고마운 마음 하나로 나는 평화롭다.  없어도 상관없다고 여겼던 사람들 얼굴을 떠올려 본다. 없어도 상관없는 사람은 나다. 내가 엷어지고... 고개를 숙인다. 그제야 나는 나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한다. 숨을 쉰다. 


인간이 가진 자부심의 어리석음을 알려주는데 우리의 조그만 천체를 멀리서 찍은 이 사진 이상 가는 것은 없다. 사진은 우리가 서로 더 친절하게 대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고향인 이 창백한 푸른 점(지구)을 보존하고 소중히 가꿀 우리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창백한 푸른 점> 칼 세이건, 2001년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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