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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임시

인간의 간악함

희생양과 마음수련 명상이야기

by 냉이꽃


마녀사냥


<마녀사냥의 광풍>이라는 책에 의하면 마녀사냥은 13세기 로마 가톨릭이 배교자를 개종시키고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 당초의 목적이었다 한다. 148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는 마법 행위를 하는 자를 처단하기 위한 교서를 내렸고 역사상 가장 극악무도한 책이라 평가되는 <마녀의 망치>라는 책을 발행한다. 이 책은 마녀사냥의 지침서로 1517년 종교개혁 이전까지 20쇄 이상이 인쇄되었다 한다. 인쇄술의 발달이 마녀사냥의 보급에 한몫을 한 것이다.


극심한 마녀사냥은 중세보다는 근세에 이루어졌다. 16-17세기 종교개혁기에 신구교 양쪽에서 학살을 하기 시작했다. 마녀사냥은 30년 전쟁이 마무리되던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주춤했고, 루터파와 칼빈파의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면서 종교 갈등의 소진과 함께 수그러들게 되었으나 18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한다. 14세기부터 대략 50만 명 정도가 처형되었다 알려진다.


Maria van Beckum en haar schoonzuster Ursel te Delden verbrand, 1544, Jan Luyken, 1683 - 1685.jpg
Jacob de Geldersman en Dirk Pietersz. Smuel op de Dam op de brandstapel, 1546, Jan Luyken, 1691 - 1693.jpg
Acht dopers op de Dam voor het stadhuis op de brandstapel verbrand, 1549, Jan Luyken, 1693.jpg


광기의 역사를 그림으로 남긴 얀 라이크는 17세기 네델란드 서민들의 생활상을 너무나 소상히 판화로 남긴 시인이자 일러스트 작가이다.


< 얀라이크Jan Luyken, 1683 - 1685 작품 >

1. Acht dopers op de Dam voor het stad -huis op de brandstapel verbrand, 1549

2. Maria van Beckum en haar schoon-zuster Ursel te Delden verbrand, 1544

3. Jacob de Geldersman en Dirk Pietersz. Smuel op de Dam op de brandstapel, 1546


마녀사냥의 이유는 참으로 다양했다. 전쟁이 나고 전염병이 돌아도 마녀 때문이고, 치료를 잘해도 마녀니까, 치료에 실패해도 마녀이기 때문이었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늙은 과부들이 타깃이 되었고, 돈 많은 과부들의 재산을 노려 마녀로 만들기도 했다. 누군가의 눈에 가시가 되어도, 앙심 품은 자가 생겨도 마녀로 희생시켰다. 재산을 뺏기 위해 마을 전체가 공모하여 일가족을 화형 시킨 사건도 있었다.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과 종교개혁 등으로 불안했던 교회와 왕권은 모든 책임을 전가시킬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리고 화형이 있는 날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 손가락질하며 구경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가톨릭 교황청이 마녀사냥에 대해 잘못을 시인한 것이 2003년이라는 점이다. 2003년에 와서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기억과 화해 : 교회와 과거의 잘못>이라는 문건이 발표되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핑계로 저지른 잘못들을 공식 인정했고 마녀사냥에 대한 잘못도 사죄했다. 인간의 집단 광기는 대체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것이며 기득권을 가진 자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하며 삻어하고 또한 비겁한지 인간이 얼마나 이상한 존재인지 알 수가 없다.


부조리의 시대


광기의 역사가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수많은 전쟁이며 수많은 심리학적 실험들이 인간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존재이며 제정신이 아닌지에 대해 증명은 할 만큼 다 했다 본다. 이 끔찍한 역사는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고 평범한 나와 너의 이야기였다. 그나마 합리주의를 거친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어느 시대건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제각각 내 바깥에서 적을 찾아냈던 것 같다. 가뭄이 드는 것은 임금 탓이었고, 왜적이 들어온 것은 동학군 탓이었다. 마을의 우환은 저 집구석 때문이고 어느 때 어디서건 너 때문이라 탓하고 벌을 주었다. 각 가정에도 희생양이 있었다. 때로는 부모 중 한 명이었고, 혹은 애먹이는 자식 한 명이 타깃이 되었다. 가정이 불행하고 문제가 생기는 것은 모두 그 희생양 탓이었다.


마음수련하며 희생양에 대해 명상했다


한 시대가 폭풍처럼 지나갔다. 청년기를 막 지나 안정되어 보이는 시대가 되자 나는 철없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열심히 잘 살고 있는데 나만한 사람도 없는데 답답한 부모와 가족들이 나를 힘들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가족 중 누구도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언니는 장녀라서 힘들고 나는 어중간한 둘째라서 힘들고 남동생은 외동에 독자라서 힘들고 막내는 막내라서 힘들었다. 부모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각자가 내가 희생양이라 생각할 뿐 다른 가족의 마음은 눈곱만큼도 헤아리지 못했다. 각자가 자기 처지와 자기 생각에만 몰두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가 크고 작은 원망과 상처와 한을 안고 살고 있었다.


나는 마음수련 명상센터를 찾았다. 열심히 나를 돌아보며 명상을 하고 있는데 어떤 부인이 질문을 했다. 맨손으로 온갖 고생을 하며 살림을 일궜는데 이제는 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는데 이 한 가지 만은 절대 용서가 되지 않고 평생의 한으로 남아있으니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너나 할 것 없이 한두 가지 쉽게 버려지지 않는 기억들로 고생을 하고 있는터라 남의 일 같이 들리지가 않았다.


" 내가 배가 만삭이 되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발로 배를 걷어찼어요. 죽어도 그 일이 잊혀지지가 않고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기만 하면 살이 떨리고 용서가 안됩니다. '

대답은 이러했다. " 걷어 차인 것도 억울한데 그걸 왜 마음에 넣어놓고 있어요? 누구만 억울해요? "


정작 걷어 찬 남편은 그걸 기억도 못한다는 말을 들으며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받은 사람이 바보인 것이다. 우리는 각자 용서할 수 없었던 사연을 정말로 버리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를 희생양으로 만들었던 기억들을 버려 나가면서 우리의 마음은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또 하나, 꽁꽁 묶인 실타래가 풀리면서 비로소 상대방도 살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랬다. 엄마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늙은 엄마의 삶이 하나하나 되짚어졌다. 눈물이 많이 났다. 누구도 어쩔 수 없었던 갈등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 무지하고 무능했다. 물어볼 줄도 모르고 헤아릴 줄도 몰랐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줄도 몰랐다. 나 또한 늙어가는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된 것이 너무나 미안하고 너무나 죄송하다.


지나간 역사와 개인사는 억울해도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이해되지 않는 역사를 만들었던 사람의 모습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원형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나간 것은 지금 우리의 거울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사람이 달라지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있는 인간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사진출처 : https://www.rijksmuseum.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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