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품위와 명상의 힘
월드컵으로 뜨거웠던 지난 7월, 전 세계 언론은 태국의 한 동굴로 향해 있었다. 6월 23일, 태국 치앙라이 탐루엉 동굴에 13명의 축구팀 코치와 소년이 갇힌 것이다. 미로처럼 복잡한 동굴은 폭우로 물이 불어났다. 입구부터
차오르는 물을 피해 동굴 5km 지점까지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7월 2일, 실종 열흘 만에 영국 구조대원들이 이들을 발견했고 전원 생존을 확인했다. 태국의 길거리에 차가 없을 정도로 숨죽이며 지켜봤던 18일간의 고립이었다. 7월 10일, 전원 무사 생환은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였고 기적이었다.
세월호 아이들을 결코 잊지 못하는 우리에게 이 일은 충격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왜 이러지 못했을까 하는 마음은 후회나 아쉬움 그 이상의 아픔이었다. 왜 우리는 이럴 수 없었을까. 태국은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동굴의 아이들이 구조되고 한 달이 넘었다. 이 사건은 더 이상 언론에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이 또한 아이들을 위한 태국의 깊은 배려와 선택이다. 그래서 잊혀지고 있는 이 시간조차도 무게감 있게 되새겨지는 것이다.
위기를 겪지 않고 살 수 없는 너와 나를 위해서라도, 위기 앞에서 너무나 어이없던 우리를 돌아보기 위해서라도 태국 동굴 소년들 이야기를 한 번은 곰곰이 생각해보고 싶었다.
일단은 태국은 대체 어떤 나라인지 궁금했다. 2015년 1인당 국민소득이 44위였다. 한국의 1/4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경제적 행복지수는 세계 1위라는 통계가 나왔다. 또한 고통지수를 측정한 결과 세계 51개국 중 1.6으로 가장 낮게 나왔다. 가난은 이들을 구속하지 않았고 가난해도 실업률은 낮았으며 물가도 안정되었다. 이 나라의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태국 사람들은 순박하고 관대하며 친절하다고 많이 알려져 있다. 방콕 지하철이 20분 이상을 정차하고 있어도 방콕 사람들은 너무나 평온하게 신문을 보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한다. 답답해하는 사람은 한국 관광객뿐이었다는 체험담은 태국을 더욱 궁금하게 한다. 이들의 여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똠양꿍과 주황색 옷을 입은 승려들... 나에게 태국은 그 정도의 상식이 전부였다. 대체 어떤 나라이기에 위기를 이렇게 아름답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Thai는 근대화 이후 바꾼 국호다. 자유라는 뜻이다. 그리고 국교가 불교이고 인구의 대부분이 불교신자인 나라다. 청소년은 어려서부터 불교교육을 받는다. 사원이 곧 학교이니 당연한 일이다. 남자는 만 20세가 되면 삭발하고 일정기간 수도생활을 한다고 한다. 태국의 남자라면 누구나 일생에 한 번은 승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를 거부하는 젊은이들도 있다고 한다.
한국의 불교도 그렇지만 태국 불교는 포살과 자자를 엄격히 시행한다 한다. 승려들의 안거가 끝나면 수행의 끝에 참회를 하는 포살일과 자자일이 있다. 이날을 모두가 귀히 여겨 국왕은 물론 신도들도 법의를 지어 스님께 공양을 한다. 이는 태국의 불교가 인간의 허물을 꽤 깊이 돌아보고 있으며 진지한 삶의 원리로 내면화되어 있다. 그들의 국교는 단순한 기복의 신앙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사원 외에도 집이건 길거리건 어디에든 불상을 모셔두고 무시로 합장하고 기도하는 것이 태국의 흔한 일상이다. 또한 3만 여개의 사원은 학교로, 병원으로, 양로원으로 기능하며 주민의 생활 속에 들어와 있다. 불교는 태국인의 삶 구석구석에 스며있고 형식이 아니라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1. 포살 布薩
매달 보름과 그믐에 모든 비구가 한자리에 모여 자기의 허물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죄를 참회하는 의식이다.
2. 자자 自恣
안거가 끝나는 마지막 포살일이 자자일이다. 보름달이 뜨면 비구가 둘러앉아 죄를 지적해달라고 청한다. "대덕들이여, 나에 대해 무언가 보고, 무언가 듣고, 또 무언가 의심을 지니신 분이 있다면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말씀을 해주십시오. 죄를 알면 곧 그것을 제거하겠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허물은 도반의 지적을 받아 고쳐 나가는 아름다운 의식이 자자다.
법륜스님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참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스스로 잘못한 줄 알고 반성하는걸 보통 참회라 한다.
둘째, 대중 앞에 드러내 놓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것을 포살이라 한다.
셋째, 자자라는 게 있다. 뭘 잘못했는지 내가 잘 모르니까 여러분이 봤을 때 제가 뭘 잘못했는지 말씀 좀 해주세요 청해서 듣는 거다.
자자가 제일 어렵다. 자자를 받을 정도면 수행이 굉장히 깊은 거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할 정도면. 막상 자자를 받아보면 스스로 청해놓고도 기분은 좀 나쁘다. 해명도 할 수는 있지만 해명이 변명이 되면 다시 자자를 받는다. 그러나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하면 변명이 되기가 쉽다."
그는 불과 25살의 청년이었다. 태국 교민잡지의 김종민 편집장은 코치가 부모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는 사람이며 아이들에게 자주 명상을 시켰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한국에 전해줬다. 능히 책임을 묻고 왜 아이들을 끌고 동굴로 기어들어갔느냐 원망도 할 법하건만 누구도 그러지 않았다. 학부모와 국민들은 그를 믿고 신뢰했으며 아이들을 잘 보살펴준 것에 감사했다.
에까뽄 코치는 아이들을 다독이면서 체내에 에너지를 비축하는 생존법을 가르친 것으로 전해졌다. 복통이 일어나지 않도록 천장이나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을 마시도록 했다. 이 물의 철분과 미네랄이 아이들 영양분 섭취에 도움이 되었다 한다. 동굴에 올 때 가져왔던 소량의 과자를 똑같이 나눠서 먹게 했다. 아이들을 먹이고 자신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물만 먹고 버텼다고 한다. 그리고 동굴에서 제일 마지막에 나왔다.
소년들이 극한의 공포와 불안을 극복할 수 있도록 정신적 지주 역할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에까뽄 코치는 공포에 떨고 있던 소년들에게 매일 명상을 지도했고 이를 통해 소년들은 침착한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다스려 나갔다. 주변의 돌멩이 같은 것으로 무려 5m의 구덩이를 파서 체온을 유지하게 했다. 그리고 소년들에게 “우리는 한 팀”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고 “우리는 반드시 살아나갈 것”이라는 확신을 줬다고 한다.
소년들이 겪었을 지독한 추위와 허기, 어둠이 주는 공포감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불안은 전염성도 강하다. 하지만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며 나름의 규칙과 질서를 잃지 않았기에 기적적인 결과를 끌어낼 수 있었다. 에까뽄 코치가 아이들에게 전한 명상법과 마음 다스리기 교육은 전원 구조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음이 분명하다.
참고 : <태국 소년들의 명상 생존법> 임은호 기자/ 법보신문 /2018.7.16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이토록 침착하고 지혜로우며 희생적일 수 있다는 것도 놀랍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극도의 어둠 속에서 아이들이 웃으며 건강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 역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를 믿고 칭찬하며 기다려주는 국민들과 학부모들 또한 너무나 놀라웠다. 왜 이들은 남 탓을 하지 않고 책임전가를 하지 않는 것일까.
태국 정부는 무국적 미얀마 난민인 코치와 3명의 소년에게 국적을 주기로 하였고, 이를 계기로 48만 명의 무국적자 난민에게 국적을 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는 보도도 있었다. 500여 명의 제주 예멘 난민 수용을 반대하며 난리가 났던 우리의 태도와는 매우 대비되는 관용과 포용의 모습이었다. 무슨 차이일까.
물론 중진국으로서의 태국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그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 기적의 귀환과 진행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인간의 품위와 명상의 힘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태국은 사원의 숫자도 많고 소수민족도 많다. 그들의 명상법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심지어 사원의 명상법에 반발하여 독립한 승려도 많다. 나는 태국의 명상을 이해하기 위해 프리랜스 여행기자인 추효정이 쓴 글을 인용한다. 한계는 있겠지만 일단의 모습을 엿볼 수는 있을 것이다. 태국 치앙마이 왓 우몽 절에서의 7일간의 명상 (매일경제 City life 제560호 , 2017년)에 대한 체험담이었다.
기자가 찍은 사원 내부의 나무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걸려 있었다.
삶은 결단력이 없지만 죽음은 결단력이 있습니다.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사원에서 명상을 지도하는 한스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명상은 심신수련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는 행위이기는 하나 결과적으로 삶은 죽음과 결부됩니다.
즉, 우리는 명상을 통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지요. 준비가 되었다면 생이 끝났을 때 전혀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릴 필요도 없지요. 그것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삶이자 죽음입니다.
태국의 불교가 명상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태국의 불교와 그 명상법은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관통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성숙한 태도가 소년들과 코치, 동굴 밖에서 13명을 지지하고 지원했던 부모들과 국민 모두의 모습에서 확인된다고 느낀다면 지나친 것일까.
동굴 밖은 거대한 구조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태국 정부는 해외 동굴 구조 전문가를 직접 섭외하였고 이례적으로 면책 특권도 보장했다. 구조 과정에서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모든 법적인 책임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해주는 조치였다. 그래서 의사는 오직 의학적 판단과 소신으로 구조 순서를 정할 수 있었다.
10,00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움직였고 구조작전에 투입된 인원도 2,300여 명이었으며 전 세계의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여기에 합류하였다.
동굴 밖에 제단을 마련하고 구조가 끝날 때까지 승려들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모두는 영웅이었지만 누구도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도 않았다. 구조가 끝난 직후 동굴은 완전히 물에 잠겼다.
JTBC 뉴스룸의 손석희는 동굴 소년들의 구조를 보도하면서 '그곳에서 언론은 흉기가 되지 않았다'는 제목의 앵커 브리핑을 했다. 태국 당국은 동굴 주변에 있던 1천여 명의 취재진에게 요청했다. "구조작업과 관련 없는 사람들은 즉시 동굴 주변에서 떠나 달라." 그리고 모든 취재진은 언론의 본능, 취재 욕심을 접고 순순히 응했다고 한다.
손석희 앵커는 이와 꼭 같은 말을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서도 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당시 언론은 속보 전쟁을 벌였고 사망자 숫자 세기에 급급했다고 전했다. 그는 재난의 현장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어 했던 언론의 부적절한 태도를 깊이 반성했고 그 점에 있어 시청자 역시 무지하고 경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삼풍 백화점이며 대구 지하철 화재며 모든 재난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는 오래도록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2015년 JTBC와 대한 트라우마 협회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20주년을 맞아 생존자들의 트라우마를 공동연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수치심과 죄책감에 시달렸고 공포감과 무력감을 느꼈으며 대형 사고가 터질 때마다 고통스러웠고 심한 우울증으로 삶을 즐길 수 없었다 한다.
세월호의 부모들과 살아남은 아이들의 상처 또한 마찬가지다. 오히려 상처에 상처를 더해주는 일이 허다한
우리 사회였다.
태국 당국은 구조작업의 진행 과정은 상세히 밝혔지만 누가 먼저 구조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아직 구조되지 않은 가족들의 마음을 보듬고자 하는 조처였다고 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태도는 나로서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낯선 것이었다. 앞다투어 내 자식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이 우리였다. 그들 모두는 기다리는 이들의 애타는 마음을 읽어내고 있었고 재난현장을 함부로 예측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구조된 후 인터뷰 없이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이후 격리된 병실의 유리문 안에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태국 아이들 사진이 보도되었다. 우리와는 너무나 달랐다. 온 사회가 한마음으로 이 아이들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태국은 가난해도 행복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지만 태국 정부는 무엇보다 먼저 아이들의 트라우마를 염려했다. 전원 생환의 환호 속에서도 무분별한 인터뷰를 금지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해외언론을 향해서는 이 원칙을 어길 경우 아동보호법에 따라 기소하겠다는 경고도 하였다. 아이들이 회복된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던 기자회견조차도 상담사를 거쳐 아이들에게 간접적으로 질문을 하게 하였다. 사람을 이처럼 귀하게 여기는 모습을 우리는 언제 본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여기 육면체가 하나 있다. 누구도 육면체의 모든 면을 볼 수는 없다. 각자가 본 3면이 전부이다. 그래서 인간은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각자의 삶이 다르듯이 그 편견이 모두 다르다는 데 있다.
인간의 갈등과 반목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어떤 누구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일까? 기원전부터 이미 인간은 자기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희랍인들은 먼저 너 자신을 알라고 경고했다.
명상은 그래서 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옳다고 믿었던 일체의 판단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보이기 때문이다. 나의 편견을 내려놓았을 때 나의 가족이 온전한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나를 돌아보았을 때 비로소 내 옆사람이 있는 그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해 투성이 자신이 보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와 당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 사는 이치를 알게 되고 사고의 균형이 잡힌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자기 성찰을 통해 편협한 자기 확신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내가 존중받고 싶은 만큼 남을 존중할 수 있고 내가 사랑받고 싶은 만큼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첫걸음이 아닐까. 나는 태국의 아름다움과 저력을 보면서 나의 행복이 모두의 행복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또한 명상이 일반화되어있는 태국을 보면서 명상은 신비롭고 관념적이며 초월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의 문제도 아니었다. 명상은 지극히 현실적인 숙제다. 삶에 매몰되어가는 우리에게는 말이다. 유불선이든 무엇이든 어떤 식으로 건 자기성찰의 시간은 필요하다.
언젠가 시간 나면 한 번 해보겠다, 은퇴하면 그때 한 번 생각해보겠다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 내면으로의 여행을 나부터 지금 당장 시작할 일이다.
그래서 태국 사찰의 7일간의 명상을 끝내며 썼던 다음의 글은 명상이 필요한, 이제 시작하려는 우리에게 매우 적절한 충고가 아닐까 한다.
“수련생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명상을 쉽게 할 수 있느냐’입니다. 답은 항상 같아요. 'It’s impossible' 불가능한 일이니 기대 말라고 말하죠. ‘어떻게 하면 집중을 잘할 수 있느냐’ 고도 자주 묻습니다. 이것도 답은 하나, 'I don’t know' 나는 알 수 없어요. 그 답은 여러분이 찾아야 해요.” 한스 스님의 말이다.
10년 넘게 수련을 하는 스님도 명상이 어렵고 힘든 건 마찬가지다. 다만 우리와 다른 점은 오랜 시간 연습이 됐다는 것, 그만큼의 경험이 쌓였다는 것이다.
“처음 여기 왔을 때는 ‘저녁이 없다, 커피를 못 마신다, 절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인터넷을 할 수 없다, 일찍 일어나야 한다, 셀프 명상 시간이 너무 길다’ 같은 불평이 먼저였어.
이제 여길 나가고 나면 제일 먼저 이렇게 말할 게 불 보듯 뻔해. ‘아, 거리에 사람이 너무 많아, 매연이 너무 심해, 시끄럽고 복잡해,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어’라고.” 마티아스는 연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떠날 때가 되어서야 아는 건 인생에겐 억울한 일이다. 한스 스님의 말처럼 ‘명상은 삶’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명상은 끝이 아니다.
추효정 기자의 < 태국 치앙마이 왓 우몽 절에서의 7일간의 명상>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