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시절
방학이 되면 가끔 시골 할머니 댁에 갔다. 아주 어릴 때 일이다. 갯벌이 있는 넓은 바다에서 언니가 가르쳐준 동무생각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면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 노래는 입에서 맴돌았다. 어지간히 좋았나 보다. 조그만 아이였던 나는 교향악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뜻도 모르는 노래를 부르면서 마냥 좋았다. 이 소소한 기억이 두고두고 생생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후로도 그 시절처럼 마음껏 노래를 부르고 구김 없이 행복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마당에는 돌을 쌓아 올려 만든 낮은 우물이 있었다. 여름이면 우물에 참외며 오이를 풍덩풍덩 던져 넣었다. 놀다가 오면 할머니는 두레박으로 건져 올린 참외를 주셨다. 저녁이면 가지를 가마솥 밥 위에 얹어 쪘다. 뜨거운 가지를 길게 죽죽 찢어 양념을 해서 상에 올려주시면 보리밥에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었다. 처음 먹어본 가지 비빔밥이 너무 맛있어서 지금도 그 기억은 살아있다. 그때만큼 오장육부가 반짝이며 온전하게 새로운 맛을 즐거워한 적은 없었다.
가난했지만 가난이 뭔지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이후로는 더 많은 과일과 갖가지 반찬을 먹게 되었지만 그런 기쁨은 없었다. 좋아도 좋은 줄을 모르고 살게 된 것은 마음에 그늘이 생겼기 때문일까?
몰라서 행복했다면, 아무것도 모르게 된 엄마는 행복했을까?
기차를 타고 무작정 딸을 만나러 오신 엄마를 보고 나는 역정을 냈다. 이렇게 오면 어떡하느냐고. 내가 올 때까지 사람 북적이는 대합실에 꼼짝 않고 기다리던 엄마의 가엾은 모습이 기억난다. 치매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으나 나는 몰랐다. 그저 외로운 노인네의 자식에 대한 집착으로 가벼이 치부했다. 이후로도 가끔 버스를 타고 어딘가를 가다가 경찰서에서 연락이 온 적이 있었다 한다.
임종이 가까웠을 때 병원에서 엄마를 보게 되었다. 늙고 작아진 엄마는 매정했던 둘째 딸을 알아보고 좋아했다. " 아유~ 저 웃는 것 좀 봐~" 사람들은 기이하게 생각했다. 밤을 꼬박 새웠다. 그리고 연명치료를 하지 않기로 했다. 몸이 온갖 줄에 매달려 묶여있는 것보다는 죽는 날까지 자유롭기를 원했다. 그리고 집으로 모시기로 했다. 그때 엄마는 의사에게 말했다. 병원이 좋으니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고. "어르신, 여기가 좋아요? " 의사의 질문에 엄마는 어린 학생처럼 착하게 대답했다. "녜!"
병원을 떠나 집으로 오니 살 것 같았다. 바람이 불고 공기가 신선했다. 무엇보다 엄마가 넓은 공간과 아늑하고 익숙한 이부자리에 있는 것이 보기가 좋았다. 그러나 엄마는 딱히 아는 것 같지가 않았다. 어디가 집이고 어디가 병원인지... 아무것도 모르게 된 엄마는 행복했을까? 아니면 행복과 불행을 떠나 있었을까?
대체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토록 꿈쩍도 못 하고 하물며 완전히 의식을 잃게 된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있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기시미 이치로, 살림, 2015, 어머니의 죽음을 보며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행복은 주관적인 경험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아우슈비츠에서도 사람들의 삶은 제각각이었다. 삶은 조건이 아니라 선택이기 때문이다. 조건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어떤 기억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 기억이 사라졌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기억에 대한 나의 평가가 스스로를 불행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어린 소년이 광장에 서 있었다. 개가 미친 듯이 달려들어 소년을 물어버렸다. 그 공포는 소년에게 평생 지고 갈 트라우마를 안겨줬다. 소년의 세상은 위험한 곳이 되어 버렸다. 차가 돌진할 것 같고 비행기가 떨어질 것 같고 병에 감염될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의 기억은 개에게 물린 그 시간에서 끝나 있었다. 그의 삶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이빨을 드러낸 개 한 마리와 공포심이었다.
세련되고 예쁜 그녀는 손목에 그어진 무수한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했다. 그녀의 세상은 복잡해졌다. 그녀는 아버지가 밉고 엄마가 원망스러울 때마다 인생을 비관하며 손목을 그었다. 그녀에게는 자해가 고통을 이겨내는 진통제였다. 내성도 생겼다. 이젠 그어도 아프지도 않다 했다. 그녀는 극도의 미움과 보복을 반복하며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지탱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마음수련 명상을 권했으나 그녀는 이 상처와 미움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원망의 기둥이 사라지면 그녀의 정신은 크게 주저앉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정면으로 보고 자신의 두발로 일어서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소년과 소녀를 불행하게 만든 것은 감당키 어려웠던 한순간의 기억이었다. 늘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평온한 많은 날도 있었지만 그들은 평온하게 살지 못했다. 소년의 마음은 항상 개에게 물리고 있었고, 소녀는 자신과 세상을 향해 칼을 그어대고 있었다.
마음 상태가 건강하지 못하면 무엇을 가지고 있어도, 무엇을 하고 있어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충실한 나날을 보내지 못한다.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기시미 이치로, 살림, 2015
방법은 있다, 과거를 직면할 용기만 있다면
나도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에 괴로웠고 벗어나고 싶고 지우고 싶었다. 그렇게 간절한데 왜 벗어나지 못했을까? 이중적인 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실패의 모든 책임을 과거에 돌리기도 했다. 그때 그 인간만 아니었다면, 그때 그 일만 없었다면, 이런 집에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하면서 핑계를 댔다. 남 탓을 하면서 자기 인생에 대한 게으름과 무책임한 태도를 합리화시켰다. 과거의 기억은 필요악 같은 것이었다. 인간은 세상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진정 자신을 아끼는 길이 무엇인지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모른다.
사람의 마음은 허상이다. 뇌에 저장된 기억일 뿐이다. 지금 코끼리를 떠올리면 떠오르고 사과를 떠올리면 떠오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허상이고 그래서 가짜마음이라 한다.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지만 자신은 부여잡고 있고 지배당하고 있다. 그걸 인식하는 것이 자기돌아보기 명상이고, 그걸 버리는 것이 마음빼기 명상이다.
지울 수 없는 상처는 없다. 허상이기 때문이다. 단지 지우고 싶어 하지 않는 자신이 있을 뿐이다. 대부분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제발 건드리지만 말아달라한다. 그런 말 속에는 깊은 두려움과 자신에 대한, 혹은 타인에 대한 불신이 느껴졌다. 그래서 길이 있어도 찾지 않는 것이다. 마음수련 명상은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다. 어린아이들도 단박에 알아듣고 마음을 비운다. 그리고 비워졌다 한다. 아이들은 비운만큼 성격이 달라지고 삶도 달라진다. 어른이 더 못 알아듣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에 가로막혀 있는 것일까?
열여섯에 소녀 가장이 된 분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조부모의 죽음을 봐야 했고 험한 일을 많이 겪었다. 그녀는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산업체 학교를 다니며 동생들을 키우고 공부를 시켰다. 그녀는 공부를 잘했지만 진학을 포기했다. 가장이라는 너무 큰 짐을 지고 희생했던 삶이었다. 형제들은 이제 자리 잡힌 중년이 되었다만 그녀만은 만성 우울증 환자가 되었다. 그녀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더 이상은 그녀의 희생을 알아주지 않는 가족들이었다. 그녀는 억울하고 외로웠으며 허무했다. 불면이 심해져서 약을 먹지 않으면 잠도 못 잔다 했다. 딸과는 대화가 단절되었고 얼굴만 보면 싸우는 사이가 되었다. 형제들은 그녀에게 진 마음의 빚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었고 그녀의 히스테리에 질려 있었다.
그녀는 동생의 권유로 마음수련 명상센터에 왔다. 생각이 막혀 강의도 들리지 않았고 남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강의 시간에도 명상 시간에도 그녀는 수마에 끌려가듯이 잠을 잤다. 너무 지친 몸과 마음이 푹 쉬는 것이라 여겨졌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녀는 벽에 머리를 찧으며 울었다. "이 바보야, 이 바보 같은 년아. 도와주는데도 왜 못 따라가고 이러고 있냐, 왜 이러고 사냐... " 한나절을 울고 쌓인 한을 풀어내더니 그녀는 더 이상 졸지 않았다. 버려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자세도 달라졌다. 의자에 몸을 파묻고 졸던 그녀가 스스로 등을 세우고 앉았다. 그리고 마음이 버려지기 시작했고 이틀 후에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정말 많이 울었다. 2주일이 지나자 그녀는 우울증약을 버렸고 잠도 잘 잤다. 그녀의 남편도 그녀의 동생도 기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그녀는 잃어버린 행복을 다시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녀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그래서 적이 보이지 않았고 적을 이기기도 힘이 들었던 것이다.
일주일 전은 물론 어제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더 좋다. 오늘은 더 이상 어제의 반복이 아닌 것이 된다, 오늘 지금 이 순간부터 관계를 시작한다고 생각하라. 그러면 오늘을 새롭게 살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계속 과거의 관계에 연연한다면 바로 그 과거에 발목을 잡히고 만다.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기시미 이치로, 살림,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