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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임시

오래된 미투 이야기

이제는 중년이 된 아이들

by 냉이꽃


15살 야생마들과의 전쟁


80년대 일이다.

남자 중학교로 발령이 났다. 망아지같이 뛰어다니는 아이들이다.

그중에서도 북한조차 두려워한다는 2학년을 맡았다.


신학기 초에 기선제압을 해야 했다.

아이들에게 얕잡아 보이면 1년을 망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첫날 첫 시간, 교실 문을 확 열어제끼고 조용히 째려보며 교탁 앞에 선다.

그리고 감정 없이 목소리를 깐다. 아이들도 숨죽이고 탐색을 한다. 이 사람과 1년 동안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다.


교실에는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만 난다.


무장이 슬슬 풀리던 어느 날의 교실


책상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과제물을 봐주고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서 홱 돌아보니 한 녀석 신발 위에 볼록 거울이 얹혀 있다.

그 볼록거울로 나의 치마 밑을 본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지켜보던 아이들이 순간 쥐죽은듯 조용했다.

나도 조용조용 말했다. " 교무실로 와 "


솔직히 태연한 척했지만


그 순간은 식민지 지배의 역사보다 더 치욕스러웠다.

왜냐? 식민지 역사는 책으로 본 것이고 이건 내가 직접 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투 고발하는 여성들의 심정을 가해자들은 짐작도 할 수가 없고

그 긴세월 홀로 삭힌 응어리는 더더욱 알 수 없다 생각한다.

글로 읽은 자도, 같은 여자라 할지라도...

위안부 할머니들의 심정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부끄러운 사람이 너냐? 나냐?


아이가 교무실로 왔다.

" 부끄러운 사람이 누고? "


아이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 제가 부끄럽습니다." 했다.


쪽팔려 미칠 지경이지만 폼나게 말했다.

" 알았으면 됐다. 가봐라. 다시는 그러지 마라 "

" 죄송합니다."

잔뜩 쫄았던 아이는 꾸벅 인사를 했다.


나는 그 사과가 진심이라 믿는다.

이제는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아이도 중년이 되었을 거다.


겉으로는 알 수 없는 그 시절 풍속화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당시 남자 학교의 여교사는 거울과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아이들은 동네에 세워진 트럭에서 사이드미러를 뜯어 오기도 했다.

그게 선생님 치마 밑 구경에는 최고라는 것이다.


어느 날은 방과 후에 빈 교실을 둘러보는데

아이들 몇이 모여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 질겁을 했다.

해괴한 만화책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난생처음 보는 만화책을 몇 장 뒤적이다가 너무 충격적이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이들은 교사가 모르는 세상에 무방비로 마구 노출되어 있었다.


이런 일에 남자 교사들은 비교적 관대했다.

사나이 대 사나이로 이해하며 토닥여줬고 시시덕거리기도 했다.

아이들은 남자는 한때 이런 실수를 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받지는 않았을까.


나중에 아이들이 알려 줬다.

가게에서 물건 훔치는 일은 안 해본 애가 거의 없고 훔치기 내기도 한다 했다.

그리고 음란물은 그냥 학교에서 공유되는 것이라 했다.


정말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일도 있었다. 친아버지로부터 수년에 걸쳐 당했던 아이가 있었다.

졸업반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지만 친지들은 난감했고 대책도 없었다.

아이는 차마 아버지를 떠나지 못했다. 그 복잡한 심정을 누구도 풀어주지 못한채

아이는 졸업을 했다.


이 아이들은 그 많은 기억과 상처를 묻어둔 채 어디에선가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혹은 모호하고 애매하게 중년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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