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많이 비워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정리 전문가는 매회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 tvN의 <신박한 정리>에서
의뢰인들은 각각의 이유로 버리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물론 버리지 못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물건에 묻어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추억이라는 과거가 사라지는 것이 아쉽고, 미래가 불편해질까 봐 당황스러워했습니다. 그 마음에 갇힌 자신의 모습을 자신은 모릅니다. 먼지 뒤집어쓴 컵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는데도 이 빠진 낡은 컵만 고수하는 할머니처럼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몸에 밴 일상을 단지 익숙하다는 이유로 옳다고 우기죠.
어느 의뢰자의 집에는 쓰지도 않는 짐이 구석구석 수두룩했습니다. 덕분에 그 넓은 집에 가장을 위한 작은 책상 하나 둘 곳이 없었습니다. 가족을 위해 묵묵히 희생했던 가장의 행복은 사각지대에 있었고, 양보하는 부모의 삶이 가족에게는 당연함이었습니다.
물건을 비우니 공간이 보였습니다. 그 공간에 가장을 위한 책상과 구석으로 내몰렸던 꿈이 놓였습니다. 새롭게 찾아진 공간은 가족 한 명 한 명의 방치되었던 삶이었습니다.
단지 필요 없는 물건을 치웠을 뿐인데 출연자들은 생각이 바뀌고 인생이 달라졌다며 진심 울기도 했습니다. 버린 것은 짐이 아니라 묵은 생각이었습니다. 묵은 짐보다 더 오래 묵은 미련이며 집착이고 타성에 젖은 습성이었습니다.
묵은 짐을 버렸을 뿐입니다. 그러나 출연자들은 자기를 찾아가고 삶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비어있는 공간은 내면의 뭔가를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늘 위태롭다
<심경>의 저자 진덕수가 말했습니다. '심경'은 다산 정약용이 마지막으로 했다는 공부로 알려졌습니다. 진덕수의 말처럼 저 역시 가끔 위태로움을 느꼈습니다. 사실 늘 위태로웠지만 나의 현 상태가 어떤 지경인지 인식하는 경우는 드물어서 가끔이라 표현했습니다.
저는 몸도 마음도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오고 더 바빠졌습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말했습니다. '위기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뭣들 하냐? 판이 달라지고 축이 달라지니 준비하라, 시대를 쫓아가지 못하면 도태된다'며 겁을 줬습니다. 너무나 지당한 말이기에 저도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이 책도 봐야 하고, 저 책도 봐야 하고, 배울 것도 많고, 준비할 것도 많고, 큰일 났다.. 싶어서 혼자 마음이 바빴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죠. 학창 시절 시험기간의 내 모습이 연상되었습니다. 허둥대느라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던 바보 같은 기억 말입니다. 명상을 했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본 것입니다. "왜 이렇게 바쁘고 마음에 여유가 없는 것일까? 뭐가 이렇게 초조한 것일까? 수많은 정보에 끌려 다니면서 남들 하는 일은 다 따라 하려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 나이도 많은 사람이... 아니 나이가 많아서 더 초조한 것일까? 뒷방 늙은이로 죽을까 봐?"
마음수련 명상을 한 덕분에 마음을 빼면 실마리가 풀린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압니다. 사람이 생각이 막히는 것은 내 생각으로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숨 쉴 수 있도록 먼저 버리고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보다 더 강한 것은 습관입니다. 앉아서 고민하는 게 저의 오래된 습관이었죠. 그러다 보니 다급하면 마음을 버리지만 그렇지 않으면 몸에 밴 습관대로 안 좋은 머리를 굴리며 고민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명상을 시작한 지는 햇수로 20여 년입니다. 처음 마음수련 명상을 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고, 세상이 그지없이 아름다웠으며, 아쉬울 것이 없었습니다. 아마 이때쯤부터 마음빼기 명상을 태만하게 한 것 같습니다. 급할 게 없었으니까요. 느긋하게 자기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며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갔고, 더 이상의 자기 발전은 귀찮아했던 것 같습니다.
코로나 상황이 1년을 넘기면서 제가 조금 잘못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죠. 길을 잘못 들면 원점에서 다시 출발하듯이 명상의 기본부터 다시 되새겨봤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밖에서 찾지 마라, 모든 것은 내 마음 안에 있다.' 했는데 나는 어디를 헤매고 있는 것일까? 나는 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은 말을 잊고 살았을까? 조금만 편해져도 마음을 잃어버리고 또다시 밖에서 헤매고, 일이 생기면 허둥거리고... 이런 게 인간인가? 아님 나만 이런가? "
사람들은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지체 없이 그것을 찾으러 동네를 헤맨다. 하지만 정작 가장 소중한 자신의 마음을 잃고서는 찾을 줄을 모른다. 심지어 그것을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다.
<다산의 마지막 공부> 조윤제, 청림출판, 2018
저는 분주한 마음을 하나하나 버렸습니다. 시대에 밀려날 것 같은 두려움, 뒷방 늙은이로 전락할 것 같은 조급함, 지금 현재에 충실하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걱정을 뒤집어쓰고 사는 어리석음, 끊임없이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남보다 앞서려고 하는 마음...
마음이 비워지니 정신이 차려졌습니다. 그리고 날뛰는 제가 더 잘 보였습니다. 인기 드라마, 예능 프로 다 챙겨 보면서도 입에는 바쁘다 소리를 달고 살았죠. 바빠 죽겠는데 이거 도와달라, 왜 도와주지 않나.. 징징대는 후배가 귀찮아 미치는 제가 보였습니다. 그것 좀 친절하게 도와주면 어때서 그렇게 인색하고 냉정하게, 무슨 큰 일을 하신다고... 여유라고는 없이 바짝 날이 서서, 온 세상을 다 끌고 가는 사람처럼 허풍을 떨고 짐을 잔뜩 지고 말이죠. 제가 참 웃겼습니다. 남들에게는 마음은 허상이다 입버릇처럼 말해놓고는 정작 저는 허상을 매우 빡세게 붙들고 살았던 것입니다.
마음이 비워지니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비로소 온전한 땅에 두 발을 딛고 선 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조급하면 바늘허리에 실을 매는 실수를 하는 법입니다. 시대에 발맞추어 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합리화했지만 저의 목표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잘나고 싶고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은 허기 그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있는 한 내가 하는 생각, 말, 행동은 모두 위선과 술수에 지나지 않겠죠.
이 속셈을 내려놓고 하던 일을 하던 대로 해야겠습니다. 아마 더 열심히 순도 높게 일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겁니다. 못생긴 얼굴에 인상까지 쓰며 살지 말고 좀 생글거리도록 노력하면서요. 가끔은 친절하게 후배도 도와주고, 바쁘다고 칼같이 잘랐던 사람에게 사과도 하고, 커피 고마웠다 인사도 할까 합니다. 안 하던 말 하려면 조금의 용기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뭐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것이니 기꺼이 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