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멀쩡하게 사는 것 같아 보여도 뒤집어 보면 누구나 나름의 고통과 짐을 지고 살고 있다.
그러나 " 너 불행하냐? "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술이라도 한잔 하고 취중진담이라도 나눈다면 모를까. 자아가 무너져버린 사람이 아닌 이상 그래도 이만하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나도 그랬다.
아무리 힘든 조건에 처해 있어도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렇게 노력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원하는 삶을 얻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까.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해서일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어떤 상황에 던져놓아도 나는 반드시 내가 행복한 이유를 찾아내었을 거라 믿어진다. 마음에 안드는 인생일지는 모르나 결코 불행하거나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때, 누가 정색을 하고 나에게 한 번만 더 물었으면 나는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짜 행복하냐?
나의 모친은 비관적인 분이었다. 모친도 처음부터 그럴리야 없었겠지만 삶은 그대를 속이는 법이니까. 자식이 섭섭하고 야속하면 신세한탄을 했고 나는 그런 말이 듣기 싫었다.
그런 모친이 인생에 감사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때가 있다. TV에서 나보다 불행한 이의 사연을 봤을 때이다. " 아이고~ 저런 사람도 있는데 나는 행복한 거지, 맞다 맞아..."
단점이라면 이 태도는 오래가질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행복이 남보다 우월한데서 찾아지는 것이겠는가. 고개만 들면 나보다 우월한 사람들이 널리고 널린 세상에서 말이다.
나보다 불행한 사람 앞에서 비교적 행복하고, 나보다 많이 가진 사람 앞에서 다시 불행해지는 것은 비교와 경쟁에서 오는 상대적 우월감과 상대적 박탈감일 것이다. 행복이라 할 수는 없다.
이상적인 자아를 성취하려는 정상적이고도 보편적인 인간의 욕구가 나에게는 자꾸 삐걱거렸다.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었지만 내가 알 턱이 없었다.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나는 책을 찾아 읽었다. 그리고 관념의 세계 속에서 살았다. 읽은 것을 안다고 착각했다. 그때는 자아성찰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나는 점점 세상이 나와는 맞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세상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라 믿었다. 나를 돌아볼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정보처리 능력이 없는 머리로 문제를 해결하다가 안되면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자기 학대는 결코 뉘우침이 아니다. 들들 볶으며 더 멀리 가라는 채찍 같은 것이었고 때로는 도피였다. 공자를 숭상했던 유학의 시대에 정작 사회는 곪아갔듯이 내가 읽은 그럴듯한 책은 현실과는 따로 놀았다.
어떤 분은 행복과 자기계발이라는 말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했다. 너무나 많은 강의를 들었고 책을 읽었기 때문이라 했다. 읽을 때는 맞다 싶어도 책장 덮고 나면 남는 것은 없다. 나 또한 끊임없이 찾고 구하고 읽었지만 또다시 뭔가를 찾아 읽어야 했다. 행복은 들어서 혹은 읽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만 나를 모르는 완고한 사람이 되어갔다. 아마도 갈수록 세상은 멀어질 것이고 나는 요즘 것들을 욕하며 살게 될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평생을 행복하게 잘 살아보려고 노력한 것뿐인데 왜 이렇게 끝이 나는 것일까?
합리화를 시킨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남들처럼 일하고 먹고 웃고 살지만 해가 지면 우울하고 불안했다. 한계에 닿을 즈음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끝에 마음에 와 닿는 명상법을 찾게 되었다. 책도 보고 검색도 하다가 해보자 마음을 정했다. 방학 말미에 1주일의 시간을 내어 마음수련 명상센터를 찾아갔다. 나는 교만했다. 그래서 자신 있었다. 결판을 내리라.
사람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왜 버려야 하는지 강의를 듣고 명상을 시작했다. 여기에서 첫 단계의 명상이라 함은 눈을 감고 살아온 삶을 돌아보는 것이다. 자기 입장에서 돌아보면 자기 연민에 빠지겠지만 저 우주에서 한 점 티끌 같은 나를 보면 삶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관점이 달라지면 다른 것이 보이는 법이다. 나는 참 많이 울었다. 너무 어이없어서 울었고 너무 기가 막혀 울었고 너무 후회스럽고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그러나 감동하고 많이 운다고 해서 자기를 바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를 허심탄회하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허심탄회란 숨김없이 터놓고 보는 마음인데 나는 내 생각이 옳다는 함정에 자꾸 빠지는 것이다. 그건 나를 똑바로 보기 싫다는 말이고 내가 믿는 것을 계속 믿으며 살겠다는 고집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아상이라 한다. 이러한 완고함과 고집은 이면에 숨기고 싶은 두려움이 있는 법이다. 꼰대는 다 나약하고 가엾은 사람들이다.
산 넘어 산이었다. 더 큰 문제는 "내가 돌아봐서 잘 아는데..." 하면서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가르치고 무시하고 때로 비난하는 더 독한 아만이 생긴 것이다.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아있는 젊은이들 훈계하는 노인과 그 옹졸함과 완고함이 흡사하다.
명상을 시작했을 때 우리 가족들은 나의 눈치를 많이 봤다. 저것이 어디서 마음을 닦고 다닌다 하니 잘난 척하는 꼴이 눈꼴사나워도 함부로 뭐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결국 한마디 했다. "니만 깨끗하고 우리는 다 더러운 인간들이냐?"
명상을 하며 나를 많이 돌아본 것은 분명 커다란 삶의 힘이었다. 나처럼 시비가 많고 무례한 인간이 화해하는 법을 배워가게 되었다. 그릇된 나를 무수히 돌아봤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나의 허물이 용서되지 않을 때는 남도 용서하지 못했다. 반대로 자신과의 화해는 타인과도 화해를 가능하게 했다. 세상에는 사실 싸울 일이 없다.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돈과 사랑과 명예가 나를 괴롭힌다고 말을 하지만 그것 때문에 불행한 것도 아니고 무엇이 달라져서 행복한 것도 아니었다. 행불행은 순전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마음 하나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나는 한때 나의 가족 때문에 불행했고 나는 왜 이 집안에서 태어났을까 원망했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가족 속에서 여유로운 정담을 나누고 있다.
나 혼자만 행복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부터 행복해질 용기를 갖자.
그것이 타자에게로,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기시미 이치로의 <늙어갈 용기>에 인용된 아들러의 말이다. 주변 모든 사람이 상처를 받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매몰차기 그지없던 나였다. 명상을 하기 시작하면서 많이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졌지만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다. 불행할 이유도 없는데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다. 과분한 부인을 두고도 한눈을 파는 중년 남자의 허기와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이기심과 욕심을 돌아보기가 참으로 어려웠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모습이 돌아봐지는 순간 큰 매듭 하나가 풀리는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