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와 자기 사랑... 헷갈리세요?
'자기애'와 '자기 사랑'. 뭐가 다른 거지?
같은 듯하지만 다른 뜻이다. 오히려 정반대의 뜻이다. ‘자기애’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당하게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하고, ‘자기 사랑’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존중함’이라고 이해하면 쉽게 구분될 듯하다. 이 둘 중, 어느 쪽으로 가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게 된다.
자기애적 성향이 강한 사람을 흔히 나르시시스트라고 부른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어떤 현상을 보일까? 그들은 어린 시절 사랑받지 못해서 초래된 내면의 아픔을 모른 채 자신에게만 집착한다. 이런 원인으로 나타나는 행동이 타인에게는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이것이 치유되지 못하고 성장할 경우 점점 더 외적인 포장을 하게 된다. 예컨대, 유명인의 이름을 거론하며 지인이라고 자랑하기를 좋아하는가 하면, 과도하게 보이는 것에 신경을 쓴다. 타인의 관심을 받으려 자신을 이상화시키는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자신의 행동이 고립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눈빛은 따스하지 않고 공허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관계가 깊어지지 못하고 친밀감을 느끼기란 더더욱 힘들다.
반대로 '자기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가? 자신의 단점, 부족한 점, 수치스러운 점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진솔함이 있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너와 나의 건강한 경계를 설정할 줄 안다. 그러니 쓸데없이 남에게 화낼 일도 없다.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뒤집어 씌우지 않을 만큼 성숙하다. 세상의 기준에 따라가지 않고, 자기 기준을 세울 수 있으니 그 경계 안에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소설 <마담 보바리>에서 주인공 엠마는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다.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끊임없이 외도를 한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원하는 삶을 이상화시켜 그 안에서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본인의 이상이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을 때마다 그녀는 우울함을 견디지 못해 일탈로 회피한다. 이상과 현실이 연결되지 않는 것이 그녀의 모습이다. 이상화시킨 자기와 현실의 자기가 일치하지 않으니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혼생활도 시시하다. 낭만적 구원을 향해서 이런저런 남자들과 데이트를 해도 채워지지 않고, 동경하던 화려한 생활도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었다. 이것저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달래 보려 사치품들로 재산을 탕진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마담 보바리는 극한의 상태로 치닫고 있을 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회피했다.
마담 보바리가 찾던 그 무엇은 어디 있었을까? 그녀가 죽기 전 마지막 장면, 한 남자의 모습이 스친다. 보봐리 부인이 밀회 장소로 가던 길에 마주친 걸인. 그가 바로 보봐리 부인 내면에 자리한 눈먼 장님이 자신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추구하던 대상은 자기 안에 있었음을 마담 보바리는 평생을 살면서도 알지 못했다. 자신을 만나지 못해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았던 마담 보바리. 참으로 슬픈 인생이다.
이것이 단지, 소설 속의 이야기일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