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넘어서는 진심
입을 열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모른다. 언어는 그 사람의 정신세계이고 살아온 역정이다. 언어가 그 사람이고, 한 사람은 그의 언어로 규정된다. 장관에 추천된 사람을 거절하면서 링컨 대통령이 했다는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과 함께 '말에서 향기 나는 사람'이라는 덕목도 많이 회자된다. 우리에게는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이 있고 서양에는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경험이 쌓이면 신념이 되고 신념이 숙성하면 믿음이 된다. 지혜에 성찰이 동반되면 고매한 언어로 표현될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경험만에 의존한 '믿음'으로 대화에 나선다면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이 많다.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요즘 큰 관심사이다. 상담을 하면서 느끼게 된 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르는 말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바른말'이란 기분 좋은 단어이다. 그러나 '바른말'을 하는 당사자는 나름의 당위성에 근거하고 보람이나 희열을 느낄지 모르지만, '바른말'을 듣는 사람의 기분은 씁쓸하거나 창피할 수도 있다. 친한 사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바른말을 해 주는 친구가 좋은 친구라는 말이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회의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꼭 해줘야 하는 '바른말'을 친한 친구에게 한 다음에 오히려 관계가 멀어지거나 또는 그 전보다 덜 솔직해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는 친했던 사이가 '바른말'로 인해 불편해졌다는 증거다.
오히려 알아도 모른 척하기도 하고, 놓았다 당겼다 하며 오랜 시간 곁에 있는 친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운 정 고운 정으로 돈독한 사이가 된다. 친구에게 바른말을 하고 싶은 욕구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친구를 위함이 아닌 근질거리는 자기의 생각을 참지 못해서 '바른말'이라는 정당성을 내세워 자기 욕구를 배출하는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믿어주는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다 보면, 사람은 각자 경험하는 다양한 상황들에 의해 다듬어져 간다. 결국,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타이밍은 서로 다르다. 옆에서 과하게 관심을 갖고 친구를 바로 잡아보겠다는 의지의 '바른말' 보다, 그냥 평행하게 살아가며 가끔 바라봐 주는 진실한 눈빛이야말로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 그냥 무조건 내 친구'가 아닐까.
좋은 친구는, 나에게 '바른말'을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