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들이여 당당하라!
내가 아줌마가 되었다. 되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새 내 안에는 ‘아줌마스러움’이 많아졌다. 나도 모르게 형성된 모습이 툭툭 튀어 나올땐 낯설기도 하다. 문득 난 어떤 아이였지? 사춘기땐 어땠었더라? 어떤 친구였지? 데이트할땐 어떤 애인의 모습이었을까? 까마득한 신혼때를 생각해보니 푹 삶아진 우거지 같은 지금의 모습과는 전히 다른 것 같다. 삶의 크고 작은 일들을 겪어내며 나는 완전한 아줌마가 되었다.
아줌마를 주제로 한 영화와 책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아줌마는 할 얘기가 많은 소재란 뜻일 게다. 내성적이고 얌전했던 성격도 아줌마라는 자리가 바꿔놓았다. 실은 세월과 세월을 타고 살아온 삶이 그렇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얌전하게 뒷전에 있어보니 남편도 자식도 건사가 안 되는 상황들이 되풀이되다 보니 어느새 숨어있던 뻔뻔함이 스멀스멀 발휘된다.
얼마 전 싱글 커리어 우먼으로 살고 계신 분과 브런치 카페에 간 적이 있다. 카페에 들어서면서 한 그분의 말에 난 뒷골이 좀 당겼다. "세상에! 동네 아줌마들이 일 안 하고 다 여기 나와 있네!"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하는 남편 챙기고, 아이들 학교 보내고, 집안일 다 해 놓고 나온 '멀티테스킹’에 강한 아줌마 들을 무시하는 발언에 화가 났다. '카페에도 맘대로 못 오면 어디로 가란 말이야...' 30년 커리어 우먼이면 세상 물정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 한 분야의 베테랑일 뿐이다. 아이가 아파서 속을 끓여본 적도, 시어머니가 늘 머리 뒤 꼭지에 따라다니는 느낌도, 음식물 쓰레기봉투 아끼려고 물기 빼려고 애쓰는 것도, 장 볼 때 세일 품목에 먼저 손이 가는 것도 그녀는 모를 것이다.
꿈 많던 시절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몸을 불사르겠다고 결혼해 아이 낳고 가정을 잘 꾸려가며 사는 아줌마들. 그녀들의 쉴 곳은 카페이다. 혼자 있는 낮 시간에 친구들과 끼니도 해결할 수 있는 브런치 카페라면 더 좋다. 제발 아줌마들에게 뭐라고 하지 말라. 행주치마에 돌을 날라 행주산성을 지킨 조선의 아줌마 후손 들을 무시하지 말라. 아줌마들이 숭고하게 가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불사르고 나면 자식은 성인이 되어 떠난다. 그리고 아줌마는 갈 곳을 잃고 방황한다. 'empty nester’ (새끼떠난 빈둥지를 지키는) 라는 말은 '아줌마'에게 또 다른 쓸쓸함의 색을 입힌다.
가정경제를 위해 물건값을 깎으며 "거참... 아줌마!" 소리를 들어가며 분명 열심히 살았는데 광명이 비출 줄 알았던 중년에 오히려 허탈감과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 학부형들과 같은 처지의 마음에 의지해 볼까 싶어 만나고 나면 돌아오는 길엔 또다시 뒤 골이 당긴다. 자기 자랑을 늘어놓거나, 상대의 마음을 찌르거나 하는 일이 많다. 심지어 내 마음은 방황하고 있는데 야무지게 다잡고 사는 친구를 만나면 그 또한 꼴 보기 싫기도 하다. 그래서 상대방도 나와 같이 허전하기를 바라는 말을 던지기도 한다.
"요즘 너 좀 이상해!" 그냥 "나 너무 힘들어!!"라고 말하면 될 것을...
상대를 배려하고 살았던 아줌마의 습관은 자기 기분도 상대에게로 돌려버리는 경우가 많다.
분명 최선을 다해 잘 살았다. 이쯤 살아왔으면 남편에게도 사랑받고 아이들에게도 인정받고 친구들과 여유 있게 빨간 바지 사 입고 예쁜 모자 쓰고 마냥 즐겁게 꽃구경 다닐 것이라 기대했는데, 현실은 '아줌마'란 꼬리표를 달아버린다. 아줌마는 우울함이라는 펀치를 맞고 휘청거리기도 한다. 중년의 우울이 얼마나 거센지 그 앞에선 열 일을 버텨낸 아줌마도 넘어진다. 어릴 때 두 살 위 오빠와 쥐불놀이를 종종 했었다. 깡통에 센 불을 많이 피우고 싶었던 나는 오빠 몰래 숯을 몇 조각 더 넣었었다. 갑자기 불꽃이 확 올라오자 당황한 나머지 이리저리 정신없이 펄쩍거렸다. 그때 오빠는 움직이면 불똥이 여기저기 튀니 침착하게 불길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맞다. 바로 그거다. 안 잡히는 마음의 불길을 잡으려 하지 말고 잠시 가만히 자신을 달래며 기다려보면 어떨까? 내가 나를 믿고 기다리면 내 속에서 고유한 색깔의 에너지가 올라온다. 그 에너지는 나를 나다움으로 꽃 피우게 하는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모든 성분의 종합 비타민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 인생에서도 고루고루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 아줌마들이여, 제발 자신 마음의 소리를 무시하지 말자. 마음이 힘들다고 보내는 신호를 외면하지 말자. 그리고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는 막연한 기대도 하지 말자. 내 마음을 가장 잘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토닥여 줄 방법과 힘을 기르는 것도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홍 씨 아줌마는 지금 빨간 바지 차려입고 막걸리 마시러 갈 궁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