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and New
오렌지색 우체통과 맹그로브 한 그루 그리고 두 대의 자전거.
새벽을 맞는 홍콩 사람들이 보고 싶어 이른 아침 산책을 나섰다. 길에서 마주한 광경은 나에게 여유로움을 선사했다. 딸아이와 나는 생일이 비슷한 시기이다. 함께 추억에 남길만한 여행지를 찾다가 홍콩을 선택했다. 처음의 계획은 조용히 쉬다 올 생각에 오키나와로 예약을 했었지만 딤섬이 실컷 먹고 싶다는 딸아이의 말 한마디에 행선지가 졸지에 홍콩이 됐다.
하지만 홍콩에 도착해 호텔로 가는 길에 딸아이의 표정을 훔쳐보니 홍콩 선택의 후회스러움을 표정으로 역력히 드러냈다. 사춘기 나이의 시각에서는 복잡하고, 지저분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사람들로 꽉 찬 도시에서 4일을 견뎌낼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여행 중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쇼핑도 매력적이지 않고, 홍콩은 단지 복잡하고 시끄러운 동양의 지옥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 때문에 홍콩 방문을 할 때마다 일을 마치면 도망치듯 떠나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홍콩의 골목골목 사람들이 사는 일상의 모습이 보고 싶었고 어느 정도 모험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특급호텔이 아닌 영화 '첨밀밀' 에 나왔을 법한 소호의 오래된 뒷골목에 숙소를 정했다.
호텔방 문을 열자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곤 한참 말을 잊지 못했다. 설마... 이는 정말 '첨밀밀' 스타일의 숙소였다. 2019년도에 1960년대를 경험하고 있는 듯한. 딸아이의 첫 마디는 "지금 서울로 다시 돌아가면 안 돼?" 하더니 눈물을 터뜨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사실 나도 울고 싶었고, 서울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를 말릴 수 없어 그냥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일을 저질렀으니 입도 못 떼고 있는 내 몫까지 제발 펑펑 울어라!' 창밖의 낡은 건물들을 바라보니 처음엔 숨이 막혔다. 그런데 '저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창밖을 바라보며 숨 막힌다고 생각할까?' 아이를 데리고서 홍콩의 허름한 동네 숙소에 머물며 역사를 고스란히 경험한다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홍콩이란 도시의 내면과 역사를 우리가 함께 체험한다는 독특한 경험도 의미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어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이해를 구했다. 며칠 동안 여기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모험을 해보자고.
180년 전 아편전쟁이라는 파란만장한 역사로 영국의 여향 아래로 편입된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세계에서 가장 왕성하고 다양한 민족의 교류처였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깔고 도시를 보면 건물 하나 간판 하나하나가 모두 어떤 스토리를 품고 있을 것 같은 곳이 홍콩이다. 없애고 새로 지어야 할 것과 보존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개념이 확실히 있어 보인다. 페리에서 보는 스카이라인이 한 달이 멀다 하고 변해가고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십 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2003년도에 태어나 상대적으로 모던한 서울의 도시 환경만을 경험하고 살아온 딸아이의 시각으로 본 홍콩의 오래된 길거리와 상점들은 그다지 친근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오래 끓인 곰국의 참 맛을 알 수 있는 중년의 시각으로는 오래된 것 들을 잘 보존하며 새것과 조화시켜나가는 홍콩이 경이롭게 보였다.
오래되고 낡은 것은 무조건 없애 버리고 모던한 빌딩을 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그들은 알고 있다. 이윤만을 좇는 냉혈인들의 도시 같지만 도심 곳곳에 시장 문화를 포용하고 있고 크고 작은 공원과 쉬어갈 벤치가 제공된 것을 보면 넉넉함의 철학이 엿보이기도 한다. 역사와 문화를 그대로 보존한 빌딩들과 상점들, 그리고 그를 굳건히 지켜가고 있는 자부심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그 뒤에 버티고 있었다. 수많은 외국인들이 모여들고 다국적 기업들이 앞에서 이끌고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홍콩을 지탱하는 또 다른 힘은 뒷골목과 시장에서 열심히 일하며 사는 로컬 사람들이다.
도착하자마자 숙소에서부터 실망한 딸아이가 잠이라도 곤히 잘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 아침 일찍 혼자 나와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봤다. 이른 아침부터 재빠른 걸음으로 일터에 가는 씩씩한 여인들. 리어카를 힘들게 끌고 가는 70대 노인들, 창문을 통해 들여다본 버스 안도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도시가 말하듯, 힘들면 힘든 대로, 배고프면 배가 고픈 대로, 삶에 소용돌이가 몰아쳐도 그 또한 그냥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고 또다시 일어나 나아가는 사람들 같았다. 어느 도시나 각각의 문화와 역사를 갖고 있겠지만 홍콩은 전쟁과 식민지화 그리고 급속한 개방이라는 독특한 역사가 있고 이런 과정 때문에 중국과는 다른 특별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좁은 땅에서 역사적인 소용돌이를 거쳐 지속적인 팽창과 불확실성을 견뎌내서인지 홍콩인들에게서는 강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가하게 쉬는 사람도 게으른 사람도 없어 보인다. 각자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일하고 치열하게 움직인다. 목소리와 말투가 왜 거친지도 알 것 같다. 이들이 살아낸 곡절이 목소리 톤에서도 드러난다.
'즐긴다'라는 것과 '따라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급성장한 나라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좋아 보일지 몰라도 여기저기 많은 오류가 있다. 홍콩의 변화가 시간에 쫓기지 않게 잘 계산되고 관리된 것이었다는 느낌을 주는 가장 큰 이유는 구석구석에 남겨진 과거와 역사의 흔적들 때문이다. 도시도 예술도 농익어 가려면 천천히 느끼면서 배우고 실패조차도 수용하는 여유를 주어야 한다. 홍콩은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가 격리되어 있지 않고 잘 섞인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는' 모습이다. 길거리 음식이 미슐랭 스타를 받는 유일한 도시는 홍콩이라고 한다. 허름한 겉모습이지만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그것들은 그냥 그대로의 존재감이 있다. 그런 마인드가 지금의 모습을 만든 것이 아닐까? 감추지도 꾸미지도 숨기지도 않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일상화된 것인데 그 속에는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없는듯하다. 시내 중심가의 모던하고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빌딩 옆 2평짜리 완탕 집 아저씨는 높은 빌딩이 올라가든 말든 세월의 물살과 변화의 높이에 아랑곳 않고 어제 했듯이 오늘도 완탕을 빚고 끓이며 미슐랭 스타를 따냈다.
삶의 솔직함이 드러날수록 '진국인 사람'인 것처럼 문화라는 것도 억지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세월을 두고 스며들듯이 형성된다. 살다 보면 극복하기 힘든 시간들이 있지만 긴 개인사를 돌이켜 보면 그저 한 장면으로 남을 뿐이다. 도시의 흔적도, 그것이 화려하든 폐허로 남았든, 결국 도시 역사의 한 장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홍콩. 홍콩에서 딸과의 추억은 이렇게 우리 둘이 함께한 역사에 기록되고 언젠간 즐거운 기억으로 끄집어 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