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검은색 망사 스타킹을 신은 그녀

열정은 아름다워라!

by culturing me

그녀의 가늘고 긴 다리에 입혀진 검은색 망사스타킹은 제 자리를 찾아온 듯 아름다움을 발산했다.

망사 스타킹이 좋아서 신어볼 때마다 나의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었는데 전혀 달라 보이는 그녀의 독특한 이 룩은 뭐지?


드디어 한국 패션계에 큰 획을 그어놓고 어느 날 홀연히 한국을 떠난 그녀를 만났다. 보자마자 '역시...'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패션을 잘 모르는 나에게 패션이란 전체적으로 잘 어울리고 멋있어 보이면 되는 거였다. 그래서 패션은 트렌드가 아닌 취향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고 보니 패션에서는 단순히 옷에 대한 취향뿐만이 아니라 살아온 세월과 경험 그리고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분출된다는 걸 느끼게 됐다. 내 앞에 서있는 50대의 그 여인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생각이 아름다웠고, 말투가 아름다웠고, 유행이 한참 지난 땡땡이 (포카돗) 원피스를 우아하게 소화할 수 있는 기품이 아름다웠고, 블라우스의 실루엣을 살리기 위해 떨어진 단추 대신 공단 소재의 리본으로 대체하는 센스가 정말 아름다웠다. 검은색 망사 스타킹을 물방울무늬 원피스와 매치해 입은 데에는 어떤 철학이 숨겨져 있을까 궁금해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은 어이없게도 모기 물린 다리를 가리기 위한 필요에 의한 선택이었단다. 엉뚱한 대답이었지만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순발력 있는 센스이다. '어디서 저런 아이디어가 나오는 걸까?' 궁금증은 불과 3시간여의 대화로서 다 풀렸다.


요약하자면 감각과 직관인데 그녀의 감각과 직관은 보통 사람들의 영역 너머에 있었다. 언어를 선택하는 섬세함이, 색감을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섞어보는 감각이, 상황과 순간의 콘셉트를 잡아내는 순발력이 뛰어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풍부한 감성과 매 순간 놓치지 않고 상대에게 집중해주는 배려가 따스했다. 그야말로 눈앞에 하나의 인간 다이아몬드가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았다. 쉽게 만날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람'이 틀림없었다.


만남의 기회에 감사하며 삶과 경험이 녹아있는 그녀의 번득이는 언어에 나도 모르게 집중이 됐다. 요즘 부쩍 사람들의 입을 통해 쏟아지는 언어들을 관찰해 본다. 패션도 언어이고, 문화도 언어이고, 예술도 언어이고, 사람도 언어로 나타내 진다. 부정적인지 긍정적인지 어떤 경험을 하고 살았는지 무엇이 자라고 있는 마음 밭인 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옷을 잘 매치해서 패션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이나 방법이 다를 뿐 모두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일 것이다.


패션을 잘 읽는 그녀는 사람의 마음도 정말 잘 읽어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생각을 대입해서 읽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읽어내는 것이 느껴지니, 그녀의 손에 들어간 모든 사물이 패션으로 재탄생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물 하나하나에도 공감할 줄 아는 그녀 앞에선 어느 것 하나 '그냥 물건' 은 없다. 모든 물건을 변신로봇처럼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시켜낸다. 심지어 상황을 묘사할 때도 색감으로 인용한다. "비즈니스를 하려면 마음이 블랙이어야 하는데 나는 핑크라서 쉽지가 않아" 박서보 화백의 물 빠진듯한 핑크색 그림 앞에서도 "1960년대 어릴 적 사이공에서 먹던 포모스트의 딸기 아이스크림 색이다"처럼 상황을 색감을 인용해 표현하니 무엇을 말하려는지 순식간에 캐치가 된다. 말로 인해 오해가 생겨나는 이유는 그만큼 생각을 언어로 전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가 언어로 묘사하는 것을 보니 생각도 센스가 있어야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고, 상황과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만 알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의 기준을 움직이지 않은 채 상황과 사람을 바라본다면 진화하지 못할 것이다. 검은색 선물 포장용 리본이 그녀의 손에선 단추를 대신하고 오히려 블라우스의 우아한 실루엣을 살려주는 소품으로 사용된 걸 보면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그중 단 한 명도 같은 사람은 없다. 직업과 경제적 여건에 따라 삶이 달라지기도 하고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이뤄낸 사람들도 세상에는 넘쳐난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아름다운 삶은 내면의 순수한 열정을 지켜내는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순수함은 세상살이가 힘들고 나이가 들며 조금씩 씻겨나갈 수 있다.


그녀의 삶도 늘 따스한 양지에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된 날들조차도 그녀의 열정이 낳은 패션에 대한 사랑을 건드리진 못 한 것 같다. 패션에 대한 열정을 갖고 비즈니스 시장에 뛰어들어서도 사랑으로 풀어내는 걸 보면 그녀의 마음 세계는 백 번쯤은 빨아야 날 것 같아지는 무명실로 짠 옷감처럼 깊어지고 있으리라.

세상적 성공이 뭐 그리 의미가 있을까? 그녀는 이미 어디에서도 빛나는 인간 다이아몬드임을.

keyword
이전 09화홍콩, 무질서의 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