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으면 보이는 것들
"혼자만의 시간이 이렇게 평화로울 줄이야! "
요즘 자주 내뱉는 말이다. 가정과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뛰어다니던 때는 세상의 속도와 책임감에 허우적거리는 삶이었고 '일당백'을 자처하며 살던 시절이었다. 그땐 인간적 성숙에 대해서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고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 그게 성숙인 줄로만 알았었다. 그렇다 보니 혼자서도 얼마든지 탄탄한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내가 말하는 '혼자만의 시간'은 물리적으로 혼자임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서가 독립되어 온전히 혼자여도 마음이 외롭거나 두렵지 않을 수 있는 안정감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상황이나 상대의 반응으로부터 크게 구애받지 않고 마음이 평안하고 즐거울 수 있는 나의 황홀한 시간은 그저 오천 원 들고 나와 산책 후 커피를 마시며 사색을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예측하지 못했던 것으로부터 새로움을 발견했을 때 기쁨이 배가 되는 것처럼 평범해 보이는 아침 산책에서 얻은 성찰을 통해 조금씩 성장되어가는 자신을 만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즐거운 일이다. 내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이해하는 내가 나의 베스트 프렌드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아침 산책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 아니다. 매일 새로운 옷을 골라 입는 것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이 되었다.
인적 드문 산책길을 걷는 여유로움이 이러저러한 일들로 구겨진 마음을 판판하게 펴준다. 푸른 잎과 꽃으로 화려하게 얼굴을 내민 나무들이 매일 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푸른 자연은 사람의 마음을 핥퀴거나 꼬집는 일도 없다. 그래서 큰 산과 울창한 숲을 가까이하는 사람일수록 마음은 더 넓어지고 여유로워지기도 하는 것 같다. 공자도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하지 않았던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지만, 산책을 통해 사색을 즐기며 행복감을 느끼기 시작한 이후로는 정신이 맑은 오전 시간은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졌다. 새소리와 바람소리로 귀와 뇌가 정화되고 나의 오감에 집중하다 보니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도 생각이 아닌 마음으로 듣게 되었다. 심지어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듣고 싶어 찾아오는 후배들에게도 생각의 회로를 작동시키기보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고 말해주곤 한다. 예전에는 직업적 습관 때문에 상대의 걱정거리가 내 일인 양 과제로 삼고 고민했었는데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해주려 하는 것이 더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 후로는 신기하게도 그 습관이 저절로 없어졌다. 그 후 마음이 편해지고 상대의 문제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 사람들을 더 좋아하고 즐겁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결혼생활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성장시켜주었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내 세계를 탄탄히 구축해 갈 틈을 주지는 못했다. 20대 초반에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았다. 해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기에 우리 둘만의 생활이었다. 결혼 7년 후에 아이를 낳았으니 7년간 우리 부부는 모든 것을 함께 했다. 밥도 항상 같이 먹고, 둘이서만 여행하고, 함께 장을 보고, 친구들을 만날 때도 늘 함께였다. 그것이 사이좋은 잉꼬부부의 패턴이라고 생각했었고, 서로의 내면에 당연히 들어가 앉아 있었다. 하지만 서로에게 집중되어 있는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를 구속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중년이 되어서야 우리 사이에 다른 것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모든 것을 남편과 함께하고 그의 곁에 있으려고만 했기 때문에 남편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은 처음 만난 20대에 멈춰 그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건강한 이해가 형성되기 전에 결혼해서인지 물리적 시간이 흐르고 있는 동안에도 정서적 시간은 서로에게 머물러 있었고 이는 서로의 성장을 방해했다.
결혼생활 속에 있는 나를 바라보게 된 계기는 40년 지기 어릴 적 친구의 무심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넌 왜 유독 네 남편에게만 감정을 솔직히 말하지 못하니?" 난 머리에 돌을 맞은 것 같았다.
" 내가? 아니야 난 내 감정에 솔직해."
" 그래 바로 그 얘기야. 너처럼 솔직하고 표현 잘하는 얘가 왜 유독 네 남편한테는 감정을 솔직히 표현 못 하냐고."
순간 부모한테 야단맞을까 봐 뭔가를 숨기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부정하고 싶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생각은 금세 꼬리로 붙어 쫓아다니며 나를 괴롭혔다. 생각은 진화하여 남편을 대하는 나의 모습을 영상처럼 머릿속으로 그려냈다. 결혼생활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일에도 나는 힘들다고 불만을 꺼내놓기보단 냉담함으로, 아프다고 드러눕지도, 시집살이가 무겁고 힘들다고 목놓아 울지도, 사회생활과 살림의 밸런스를 깨뜨리지도 않고 살고 있는 것이었다. "어 잠깐만. 왜 저기에 나는 없고, 역할을 수행하는 여자만 있는 거지? 저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닌데?" 내면의 자아가 형성되기도 전에 결혼한 미성숙했던 나는 예민한 남편을 편안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었다. 그 마음이 남편과의 관계에서 고착되어 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고 그것이 사랑이자 배려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나를 지지했다. '잘하고 있는 거야. 결혼생활은 잘 참는 게 현명한 거야'라고. 하지만 잘못된 노력이 남편에게 솔직하게 다가갈 수 있는 마음을 방해했고, 긴 세월 동안 내 마음엔 건강한 관계를 방해하는 이물질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을 인식한 우리는 잘못된 관계를 수술대 위에 올려 대수술을 했다. 그리고 건강한 부부관계는 서로에게 무엇을 해 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자기 씨앗을 알아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인간의 탁월함은 깨달음에 있다. 우리는 꽃봉오리가 결국은 꽃을 피울 것이라는 믿음으로 각자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성장통을 겪고 있다. 그리고 각자에게 익숙한 부분을 서로 대신해 주던 습관을 멈추고 스스로 해결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조용히 바라봐 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나마 중년의 결혼 위기를 넘기고 있는 것은 젊은 시절 진심으로 서로를 다 내어줄 만큼 사랑했던 마음이 밑거름이 되고 있다. 사랑도 근육처럼 축척해 놓은 만큼 헛되지 않고 필요한 시기에 다 쓰인다는 믿음이 있기에 오늘도 산책에서 위로와 깨달음의 풍요를 만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