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몸짓은 감춰지지 않는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칼릴 지브란과 메리 헤스 겔의 책 제목이다. 책장 속에서 누렇게 바래버린 채 있던 이 책은 청소년 시절 선생님으로부터 추천받은 책인데 그냥 제목에 매료되어 사모하게 된 그런 책이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다 보니 지금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심오한 내용의 책이다. 내용의 깊이도 모르면서 그런 책을 옆에 두고 있으면 근사해 보이겠다고 자신을 속였다는 걸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겠다. 어떤 게 자신을 속이는 것인지. 속이는 행동은 별것 아닐 수 있지만 머리로 자신을 속일 때마다 영혼은 자신과 멀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경험을 언어로 다 표현해 내기는 쉽지 않다. 보이지 않는 그 무한한 세계를 넘나들었던 작가가 그 경험을 한 마디로 정의한 이 '제목'만으로도 나에겐 큰 의미가 있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보여줄 수 없는 것들에 비하면.' 책 속의 이 말처럼 사랑뿐만이 아니라 삶의 경험이 무르익을수록 내가 알던 것은 점점 더 작아지고 있는 것 같다.
나 스스로의 판단으로는 '이 정도면 괜찮지'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판별력이 더 생기면서 돌아보면 '만족스러운 나'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아마도 곱이 곱이 여러 번 경험을 하겠지만, 자식은 엄마를 정확히 비춰 줄 때가 있다. 아이가 장황하게 불만을 토로할 때 나는 아이의 생각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나에 대한 불만을 3개의 단어로 표현해줘" 하고 요구했다. 이에 대한 딸의 대답은 깜짝 놀랄 만큼 정확하고 정곡을 찌르는 3개의 형용사였다. 그리고 나는 그 단어들을 밤새 곱씹으며 돌아본다.
처음엔 받아들이기 싫어서 화가 머리끝을 찍고 심장을 때린다. 그러다 도저히 속으로 분을 못 삭이면 입으로 똥(욕)이 막 튀어나온다. 물론 나 혼자 방에서 일어나는 나와의 싸움이다. 그러다 조금 더 침잠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생각을 하게 된다. 논리적으로 이리저리 끼워 맞춰보며 생각의 회로를 비틀어 본다. 그다음 단계는 아이가 내뱉은 단어에 나 자신이 대입된 보기 싫은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생각과 마음은 항상 따로 작동하는데 생각과 마음의 내용이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래서 드는 마음을 위에서 하는 생각이 잡고 휘두른다. 특히 부모들은 자식들 앞에선 더더욱 자신의 생각과 마음이 일치하는 줄 착각하고 훈계라는 걸 한다. 알곡 없는 쭉정이를 아무리 털어봐야 나올 게 없는 걸 모르고 말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내 모습도 남에게는 보일 수밖에 없다는 간단한 사실을 우리는 왜 깨닫지 못할까?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길은 1초도 걸리지 않지만,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사람에게 다가가기란 평생이 걸릴 듯싶다. 인간관계의 초기에 거리가 느껴지는 사람은 관계가 오래 지속되어도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는 경험을 아마도 누구나 해 봤을 것이다. 우리는 이를 아주 단순히 "코드가 안 맞아"라고 표현한다. 과연 코드가 안 맞는 것일까? 진실은 빗나가는 일이 없다. 코드가 아닌 둘 중 한 사람, 아니면 둘 다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간격은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스스로 허물어야 하는 벽이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