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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고 말하지 못한 미안함

내 초록색 구두의 진실

by culturing me


밤새 내린 눈은 한 번에 세상을 하얗게 만들었다.

올해는 눈이 몇 번 안 내렸던 터라 하얗게 눈 덮인 창밖을 보니 기분이 좋아져 아침부터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미세먼지로 시달리고 있어서 그런지 기쁜 마음이 배가 됐다. 특별한 약속이 있는 날은 아니지만, 뽀드득 뽀드득 눈이 밟고 싶어졌다.


외출을 준비하며, 눈이 내렸으니 뭐를 신고 나갈까?... 신발장을 열어 고민하던 중에 문득 생각이 났다. '어... 내 초록색 구두!' 지금은 내 신발장에 있을 리 없는 어릴적 초록색 구두가 삼십삼 년을 뛰어넘어 갑자기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잠시 멍하니 서있는데 눈물이 났다. 이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구두 내놓으라고 옆에 누가 있으면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로 북받쳐 올라왔다. '새하얀 눈'으로 기쁘게 시작한 아침은 두 시간 만에 눈물바다가 돼 버렸다.


초록색 구두가 뭐길래...

그 구두는, 내가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아빠가 사준 구두였다. 생일선물로 손수 색깔과 디자인을 골라 맞춰온 것이다. 하지만 그때 중학생이었던 나는 그 선물을 받고 달가워하지 않았었다. "학생이 이런 초록색 구두를 어떻게 신어? 검은색은 없었어?" 라고 하니, "학교에 신고 가지 말고, 개나리 피는 봄이니까 외출할 때 신으면 되지. 초록색 구두를 신고 노란 꽃길을 걸으면 우리 딸 정말 예쁘겠다"라고 하셨었다. 하지만 나는 초록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신발장에 넣어두고 그해 겨울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신지 않았다. 아빠는 내가 어른이 되기 전까지 정말 많은 신발을 사주셨었다. 이렇게 유독 신발을 사준 이유는, 내가 일곱 살 때 사고로 일 년간을 걷지 못해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걸을 수 없을 줄 알았던 딸이 걷게 되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아빠는 너무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무지개 색깔 별로 일 곱 켤레의 운동화를 사왔었다. 하지만 나는 아빠의 선물을 그다지 고분고분 감사히 받는 딸이 아니었다. 색깔이 맘에 안 든다, 디자인이 싫다, 길이가 짧다, 부드럽지가 않다, 장식이 너무 크다 등등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아빠는 나의 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별의별 요구를 다 반영하며 사다 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사고당했던 딸이 살아서 걸어다니는 게 너무 좋으셨던 것이다.


오늘 아침, 초록색 구두에 얽힌 추억 소환은 눈 때문이었을 것이다. 1986년 봄에 선물 받고 색깔을 극복할 수 없어 한 번도 안 신었던 구두를 그해 첫눈이 내린 날 초록색 구두를 신고 눈밭에서 사진을 찍으면 예쁘겠다고 하시며 카메라를 갖고 나가자고 했었다. 나는 눈밭에서 놀고 싶은 마음이 앞섰고, 별로 좋아하지 않던 초록색 구두가 눈에 젖어 망가져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아빠를 따라나섰다. 그러나, 며칠 후 그날 찍은 사진이 너무 예뻐 깜짝 놀랐다. 하얀 눈 위를 걷고 있는 초록색 구두. 하지만,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초록색 구두를 신은 날이었고,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구두에 미련을 가져 본 적도 떠올려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삼십삼 년이 지난 오늘 왜 갑자기 그 구두를 생각하며 눈물이 났을까...? 미안함 때문이다. 고마운 걸 고맙다고 하지 못한 미안함. 아빠가 딸에게 가장 좋은 걸 주고 싶었던 마음을 몰라준 나의 무지함으로부터 비롯된 미안함.


지금은 고마운 것도, 미안한 것도 다 알게 되었고, 나도 이제는 아빠에게 좋은 수제구두를 맞춰줄 수 있게 되었는데 아빠는 이 세상에 안 계시다. 이미 떠나신지 십이 년이나 되었다. 그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미안함. 오늘은 슬픔이 내 가슴을 때린다.

지금, 아빠가 사줬던 초록색 구두는 없지만, 신랑이 신혼 때 사준 비슷한 스토리를 갖고 있는 검은색 트렌치코트라도 입어야 마음에 위안이 될 것 같아 꺼내 입었다. 밖에는 아직도 펑펑 눈이 내리고 있어 간절기용 트렌치코트를 입고 나가기엔 추운 날씨지만, 몸이 추운 게 마음이 추운 거보단 낫겠단 생각이 들어서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위해 고른 선물에 스며들어있는 마음을 내가 진작 알았더라면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미래의 시점이 되어서야 과거의 진실을 깨닫게 되나 보다. 내일의 과거가 될 오늘. 오늘의 어떤 일들이 미래에 진실로 남을까?

"딸아, 니 자신을 가치 없는 곳에 두지 말아라. 생이 그리 길지 않더라"

가슴에 와닿지 않던 아빠의 유언이 오늘에서야 가슴에 들어온다. 아빠가 즐겨듣던 패티 김의 '초우'를 들으며 눈이 녹을 때, 내가 아빠를 아프게 했던 마음도 함께 녹아없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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