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내 경력은 구명정일까, 뗏목일까

안락한 회사를 떠나기 전 반드시 챙겨야 할 '잡동사니'에 대하여

by 중년의 모험가

무인도에 안주하지 않는 자만이 대양으로 나간다


아주 오래된 영화 <캐스트 어웨이>가 문득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바쁜 회사 생활에 치여 살던 주인공이 비행기 추락으로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구명보트에 의지해 탈출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집어삼킬 듯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에 막혀 좌절합니다. 시간이 흐르며 주인공은 무인도에서의 고립된 삶에 그럭저럭 적응해 가지만, 결코 그곳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곳을 벗어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품고 하루하루를 견뎌냅니다.

결국 그는 바다에서 떠밀려온 온갖 잡동사니와 섬에서 구한 재료들을 모아 투박한 '뗏목'을 엮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뗏목으로 파도를 넘어 망망대해로 나아갑니다.



내가 믿었던 구명정의 유통기한


안락한 직장 생활이 끝나는 날, 나 역시 무인도에 홀로 던져진 주인공과 같은 처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서늘한 질문을 던져봅니다. 내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화려한 경력'이라는 구명정은, 어쩌면 회사라는 테두리 안의 잔잔한 호수에서만 효용이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생각만큼 멋진 삶을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럭저럭 버티며 살아가겠지만, 저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나만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현실의 집채만 한 파도를 넘기 위해, 지금 나의 사고 회로와 업무 방식을 재점검하며 나만의 튼튼한 뗏목을 구축해야 할 시간입니다.



감정의 조각으로 그린 인생 지도


나는 이제껏 모아온 경력의 파편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기로 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어제 일 같은 첫 출근날의 설레던 기억, 목표 달성을 위해 부서지도록 몰입했던 순간, 그리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칼로 그은 듯한 통증을 느꼈던 고통의 시간들이었습니다.

논리적인 성과보다 감정적인 기억들이 먼저 몰려왔지만, 나는 그 시간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나만의 '인생 지도'를 그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무의미하게 흩어진 잡동사니 같은 경험들을 모아 일관된 서사를 만들고, 그것을 생존을 위한 무기로 벼려내는 작업입니다.



중국 지사에서 배운 '존중'이라는 기술


지난 몇 년간의 직장 생활은 초보 리더로서 겪은 좌충우돌의 연속이었습니다. 나의 첫 리더 경험은 중국 지사의 부장직이었습니다. 그곳에서의 일상은 단순히 업무를 지시하는 차원을 넘어섰습니다.

언어가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부장이 와서 통역에 의존하고 한국식 사고방식을 강요하다 떠날 것이라는 현지 직원들의 고정관념. 저는 그 장벽을 넘기 위해 사전적 의미 너머에 숨겨진 그들의 언어를 해석하고 마음 깊이 공감하려 애썼습니다. 일상적인 소통으로 신뢰의 두께를 더하고, 문화적 이질감을 존중으로 메우며 함께 성과를 일궈냈던 그 시간은 나에게 '존중과 조율의 기술'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신입사원이라는 거울을 통해 본 성장


한국으로 돌아와 팀장을 맡게 된 곳은 신설된 지 겨우 1년이 된 팀이었습니다. 베테랑 사원들은 떠나고 신입사원만 네 명인 소규모 조직. 업계에서 유례없는 급성장을 기록 중인 제품군에서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팀의 업무 자체가 '인큐베이팅'인 상황에서, 저는 신입 사원들이 조직에 연착륙하고 각자의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돕는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깨달았습니다. 누군가의 성장을 돕는 헌신이 결국 나의 역량을 키우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지도 제작자’이다


세스 고딘은 저서 **<린치핀>**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을 두 가지로 정의했습니다. 바로 **'감정 노동'**과 **'지도 제작'**입니다. 사람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마음을 얻어내는 에너지, 그리고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스스로 설계하며 나아가는 개척 정신입니다.

회사 안에서 내가 했던 소통과 훈육, 조율의 시간들은 결코 단순한 잡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고도의 감정 노동이었으며,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최선의 길을 찾아낸 지도 제작의 과정이었습니다.



대양을 향한 뗏목은 이미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나의 작은 경험들을 모아 뗏목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이것이 대양의 큰 파도를 넘을 수 있을 만큼 견고한지는 아직 불명확합니다. 본격적인 도전을 시작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 소중한 무기들을 배낭에 챙겨 넣으려 합니다. 무인도를 탈출할 나만의 뗏목은 이미 내 안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넥타이를 풀고 마주할 그 거친 바다 앞에서, 나는 비로소 나만의 노를 저어 나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월요일 연재
이전 17화Chapter 04. 40대, 다시 사춘기를 앓아야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