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

by 중년의 모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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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용무도, 시급한 일도 없었기에 금요일 오후 반차를 내고 무작정 번화가를 거닐었습니다. 새로 생겼다는 쇼핑몰을 둘러보고 평소 눈여겨보던 전자제품도 만지작거려 보았지만, 지갑을 열지 않겠다는 올해의 다짐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익숙하지 않은 배회 탓인지 금세 흥미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지도 앱을 켜고 근처의 중고 서점을 검색해 찾아가는 제 모습을 보며 피식 헛웃음이 났습니다. 이 정도의 소소한 일탈이라면 퇴근 후에 해도 충분했을 텐데 말이죠. 그럼에도 전국 체인 서점이 주는 묘한 안도감과 지역 특유의 분위기를 엿보는 즐거움을 안고 서점 문을 열었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반차의 명분을 핑계 삼아 서가를 뒤진 끝에 묵직한 주황색과 검은색 표지의 『사피엔스의 의식』을 집어 들며 보람찬 오후를 마무리했습니다.


2

세스 고딘의 『린치핀』을 보면 위기 상황에서 우리를 안전하고 익숙한 곳으로 도피하게 만드는 '파충류의 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혈기 왕성했던 20~30대 시절에는 어려운 일 앞에서 즉각적으로 화를 내거나 회피하는 일이 잦았고, 어느 정도 사회적 위치에 오른 지금은 새로운 도전보다 현재의 안정을 좇으려는 제 모습 역시 이 파충류의 뇌가 작동한 결과일 것입니다. 삶이 버거울 때면 현실을 외면한 채 마음속 동굴로 숨어들어 혼자만의 회복 시간을 가졌던 경험이 있기에, 뇌과학자와 소설가의 대담을 엮은 『사피엔스의 의식』을 통해 이러한 본능이 단순한 비유가 아닌 물리적인 뇌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사랑, 공감, 두려움 같은 관념적 감정들이 실은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뇌의 역할이라는 점은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3

하지만 최근 정해진 생활의 규칙이 깨진 것인지, 마음에 근심이 생겨 리듬이 어긋난 것인지 알 수 없는 정체 모를 불안이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권 반씩 읽어내던 독서량은 이주에 한 권으로 줄었고, 은퇴를 앞둔 40대 직장인의 이야기를 활자로 엮어내겠다는 다짐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보아도 정작 손가락은 의미 없는 유튜브 영상만 헤매며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냅니다. 이유 없는 허기에 무언가를 집어 먹고 늘어난 체중에 자괴감을 느끼는 악순환 속에서, 미래에 대한 이성적인 불안이 오히려 무기력과 회피라는 본능의 방어기제를 깨운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고도 씁쓸하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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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혼란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 고민하다가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명제를 떠올렸습니다. 무언가를 하지 않겠다는 부정의 다짐은 오히려 결핍과 집착을 부르기에, 이제는 '긍정의 목표'로 방향을 틀기로 했습니다. 허기가 질 때는 굶주림과 싸우는 대신 견과류 한 움큼을 씹거나 향긋한 차를 마시며 뇌에 새로운 보상을 주고, 무너진 독서와 글쓰기의 리듬을 되찾기 위해 거창한 의지력 대신 환경을 재설계하고 있습니다. 꼭 노트북 앞이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집안 곳곳에 책을 놓아두며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으로 일상 속 글의 조각들을 가볍게 수집하는 식으로 실천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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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도 마르지 않는 성취에 대한 욕망과 피할 수 없는 관계의 스트레스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혼란을 본능의 탓으로 돌리며 방치하기엔 제 삶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먼 미래의 불안에 잠식당하는 대신, 흐트러진 책상을 정리하고 따뜻한 차를 내리며 책의 첫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등 지금 당장 통제할 수 있는 작은 일들부터 챙겨보려 합니다. 이 작고 구체적인 승리들이 쌓여 막연한 공포를 단단한 안도감으로 바꾸어 줄 것이라 믿습니다. 결국 파충류의 뇌를 다독이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지금 여기'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저항을 묵묵히 시작하는 일일 것입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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