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너머로 마주하는 시간들
중고책을 사서 읽다 보면 종종 책의 전 주인이 남긴 독서의 흔적을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면 묘하게 즐거운 기분이 든다. 나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던 문구에 형광펜이 칠해져 있거나 밑줄이 반듯하게 그어져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반대로, 도저히 읽기를 멈출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한 대목에서 책장을 덮고 갈피를 접어둔 흔적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처럼 같은 책을 읽더라도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과 반응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신선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비록 동일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책장 곳곳에 남겨진 흔적을 통해 미지의 누군가와 무언의 감상평을 나누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는 책에 박힌 단단한 활자를 읽어 내려가는 일차원적인 재미를 넘어, 중고책만이 줄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이다.
사실 이러한 감상은 타인의 흔적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어 읽을 때도 비슷한 생각이 들곤 한다. 몇 년 전 처음 읽었을 때는 아무런 울림 없이 스쳐 지나갔던 문장이, 새로이 읽을 때는 마음속 깊은 곳에 묵직한 파문을 던져주는 일이 종종 있다. 책에 담긴 활자는 단 한 글자도 바뀐 것이 없지만, 그 시간 동안 변모한 나의 내면이 동일한 내용조차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시 읽는 책이란 단순히 작가와 재회하는 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과거의 나와, 어느덧 시간이 흘러 조금 더 성숙해진 현재의 내가 마주 앉아 조용히 독서 토론의 장을 여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이야말로 독서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진정한 즐거움이 아닐까. 독서는 단순히 타인의 글을 눈으로 좇는 행위가 아니다. 읽는 사람의 고유한 개성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처음 읽느냐 두 번째 읽느냐에 따라, 혹은 그가 처한 삶의 상황에 따라 마음속에 남겨지는 여운의 깊이와 모양이 매번 달라지는 참으로 입체적인 경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