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나쁜 기억
서울은 어제 눈이 펑펑 내렸다는데 쿠알라룸푸르는 날씨가 늘 비슷해 시간의 흐름이 더딘 느낌이다. 오늘도 한 여름 날씨라 점심은 이웃에 사는 주재원 가족 영미 씨와 이국땅에서 비빔냉면을 먹으며 서울 가면 무엇을 제일 먼저 먹을지 이야기를 나누다 종합병원 간호사인 영미 씨가 전해 준 '태움'이라는 간호사들만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식사 후, 아이들 하원 픽업에 바빠 나의 지리멸렬했던 미생 시절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는데 재가되도록 까맣게 타들어가야 끝이 났다는 '태움'이야기에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두 사람이 떠올랐다. 각기 다른 직장에서 겪은 이 두 사람은 팀원들의 직장 생활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던 공통점뿐만 아니라 불행했던 가정사와 실패한 퇴직 이후 행보마저 비슷했다. 비 내리는 쿠알라룸푸르의 밤에 그들의 이야기를 꺼내본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2000년은 대학 졸업과 함께 입사를 한 해이다. 학부 시절의 인턴 기간을 제외하면 총 16년의 직장 생활을 했고, 4번의 이직을 거쳤다. 첫 직장에서의 5년은 지금까지도 고마운 곳이다. 신입사원에게 직무 역량 교육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아 다양한 해외 박람회 참관의 기회와 외부 교육도 많았고, 학부 시절엔 배우지 못했던 실무 스킬을 대부분 이곳에서 배울 수 있었다. 입사 시험이 빡빡했던 만큼 동기들과도 각별했고, 스스로가 역량이 부족한지도 몰랐던 나는 똑똑한 동기들을 부러워하며 한편으론 그들과 비슷해지기 위해 노력했고 그 덕에 사회인에 가깝게 성장할 수 있었다. 따듯하고 인간적인 상사들도 많았고 롤 모델을 삼았던 여자 선배들도 여럿 있었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가깝게 지내는 지인들을 만들어준 첫 직장에 대한 애틋함이 크다.
그런 좋은 곳을 왜 그만두었냐고 묻는다면, 진심으로 너무 어려서 경솔했다고 답하고 싶다. 직장생활 만 4년 이 지날 때쯤 누구나 한 번은 온다는 매너리즘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숱한 우려와 조언에도 당시의 철없던 20대 후반의 나는 고집을 부렸고 새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커리어를 쌓아 좀 더 프로페셔널 한 인재가 되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혔었다. 직장생활이라는 게 어딜 가도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작은 영역의 전문가일 뿐이건만 그때는 치기 어린 생각에 매너리즘의 돌파구를 이직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어리숙하게도 사회를 너무 몰랐고 회사에도 계열사와 직무에 따라 신라시대에나 있을법한 육두품이 존재한다는 걸 중간 관리자인 과장 무렵에야 깨달았다.
그렇게 새로운 회사에 입사했고, 모든 것이 이전과는 사뭇 다른 경직된 조직문화인 곳에 다행히 아직 20대 후반이었기에 적응은 바로 했었다. 내가 속한 팀은 팀워크가 유난히 좋았는데 이유는 모두의 증오 대상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M 부장. 그는 내가 이직 후, 6개월이 된 시점에 새로 온 팀장이었다. 그는 발령 이후 성추문으로 정직 후 다시 재 발령된 이라는 풍문이 돌았다. 늘 과장된 큰 목소리로 긴 궤변을 늘어놓는 것으로 월요일 회의를 시작했던 그는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여직원이 포함된 다수의 사내 업무용 카톡방에 음란물을 다량 유포하고 해고당했다. 해고 이후 차린 식당과 카페가 연이어 실패하고 아직도 회사 주변을 맴돌며 몇 안 남은 그 또래 옛 동료를 붙잡고 하소연하는 비루한 모습이 종종 보인다고 한다.
10년도 넘은 전 직장 상사의 해고 소식에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저 사람은 역시 변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을 뿐이다. 그는 내가 근무하던 시절에도 똑같았다. 금요일 저녁 8시면 어김없이 회의 테이블 모서리 끝에 바짝 붙어 앉아 필리버스터 저리 가라 장 시간 불 필요한 1:1회의 하기, 대학을 갓 졸업한 아르바이트 혹은 비정규직 어린 여직원들만 모아 인사팀에 잘 이야기하겠다며 남자 부장급들 하고만 회식하기 등등 갖은 저열한 방식으로 직장생활이 이런 건가 하는 자괴감이 들게 만들었고 그의 괴롭힘엔 남자 직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주 타깃은 사내에서 인기가 많은 j대리였다. 일도 스마트하게 하고 유쾌했던 j대리는 아내밖에 모르는 사랑꾼에 동료들과의 관계도 늘 좋았다. 모두 j대리와 일하는 걸 즐거워했기에 팀장에겐 눈의 가시였다. 여기서 다들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일도 잘하고 대인관계도 좋은 j대리를 팀장은 왜 싫어한 것인가?
팀장은 전형적인 열등감에 사로잡힌 존재였다. 앞서 언급한 일화를 보면 내가 일한 회사가 수준 낮은 구멍가게 같겠지만 그런 존재가 있었더라고는 믿기 어렵게 누구나 다 아는 대기업이었다. 물론 그는 나 역시 싫어했다. 당시 미혼이던 나에게 많지도 않은 연봉 계약을 하며 이 많은 월급을 받는 이유를 모르겠으니 자신에게 매달 급여의 30%는 술을 사라는 진심을 농담처럼 하곤 했었다. 그는 늘 집에 가기를 싫어했고 어떻게든 직원들을 붙잡고 술자리를 갖고 싶어 했다. 이는 그 다음번 입사했던 회사의 팀장도 똑같았다. 둘 다 가정사가 원만치 않았다. 특히, 우리가 한주를 편하게 지내기 위해선 월요일 회의 때마다 묻는 팀원들의 주말에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에 정답이 있었다. 엄마랑 싸우고 잤어요, 혹은 밀린 빨래하고 내리 잤어요. 시댁 다녀왔더니 피곤하네요. 한숨도 못 자고 운전만 했어요. 등 이렇게 대답을 해야 한 주가 편했고 팀원들 모두 불행 경쟁하듯 주말을 지루하게 보냈다고 대답했다. 분위기 파악이 덜 되었던 경력 입사자의 주말 캠핑 이야기는 캠핑 떠날 정신에 일이나 더 하라는 갖은 폭언과 쓸데없는 업무 폭탄으로 화답하는 게 그 팀장의 방식이었다. 상황이 늘 이렇다 보니 2박 3일 일정으로 가까운 해외여행을 다녀온 동료는 휴가 사용 시 들을 잔소리가 지겨워 월요일 새벽 5시에 공항에 내려 입술이 다 부르트고 눈엔 핏발이 선 채 그대로 출근을 하였다. 지금같이 주 52시간 근로시간 시행의 시대엔 상상도 못 할 이야기지만 불과 10여 년 전까진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상이었다..
두 팀장 중 한 명의 별명이 '천박이'었다. '천박하다'는 이 단어 하나로 그의 인성을 짐작들 하리라. 두 팀장의 공통점은 퇴직 이후도 비슷했다. 두 사람 모두 불명예 퇴직을 하였고 업종은 다르나 사업을 시작했다 단기에 실패했으며 한 사람은 병을 얻고, 다른 이는 한국이 아닌 타지에 나가 사는데 가정은 깨졌더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렇게 될 것을 무엇이 그들을 늘 그렇게 악에 받치게 했을까? 다들 일 하는 평범한 직장인데 왜 그들은 그곳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군림하고 포악했을까?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 둘 모두 회사가 유일한 그들의 탈출구였다. 그 둘은 모두 아내와 자녀가 있음에도 집에 가려하지 않았다. 그 둘 모두 회의 시간에 묻지 않아도 자신들의 가정사 이야기를 즐겨했는데 늘 아내와 자식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앞서 언급한 성추행 팀장은 딸 만 둘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늘 여직원이 아닌 여자로 보는 눈을 장착하고 있었고 우리 팀원 모두 그가 늘어놓는 궤변 속에 그가 심각한 외모 콤플렉스와 학벌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 두 번째 팀장은 아내 그리고 처갓집과의 갈등을 서슴없이 말하는 이었고 듣는 이에겐 심각하게 들리는 아이의 왕따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언급하곤 했다. 무엇하나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매주 월요일 아침에 장 시간 듣는 건 고역이었다. 고과 시즌엔 정량평가에 버금가는 정성평가 권한을 쥐고 있음을 어김없이 강조하며 연말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각자가 감내해야 할 문제의 깊이는 다르겠지만 지속적인 직장 스트레스는 스스로가 매몰되어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다. 내 고충을 누군가 들어주면 좋겠지만 사내에선 언급하기가 조심스럽고, 내 스스로가 사회생활을 해 나감에 있어 자질에 문제가 있는 것만 같아 괴롭기만 하다.
각기 다른 직장에서 만난 두 팀장이었지만 그 둘 모두 가족에겐 의지 할 수 없는 결핍된 존재들이었다. 인정받아 본 적 없는 이들의 특성은 늘 타인을 짓밟으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든다. 특히나 좀 더 행복해 보이고, 뛰어나 보인다면 그들에게 그건 영원히 가져 본 적 없는 것들이기에 더욱 밟아 없애고 싶은 것들이다. 사활을 걸고 지켜야 하는 국가 간 전쟁도 아니건만 뺏고 뺏기는 보이지 않는 일들이 사내 공기 속에서 무수히 존재하는데 직장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와 한 발치 떨어져 바라보면 그들에게 받은 스트레스는 그들의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었다. 나 또한 그 안에 있을 땐 그러지 못했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더라면 스트레스 그만 받고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영민하게 당시 상황을 넘겼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최근 인터넷 서점을 중심으로 인기 검색어에 '퇴사'가 나온다. 정말 '퇴사'가 답일까? '퇴사'가 트렌드인가? 퇴사를 하고 지구 반 바퀴쯤 돌고 다시 취업을 했을 때 그들과 같은 상사가 전혀 없을까? 얼마 전 경력 입사자에 대한 한 팀장의 글을 보았다. 내용인 즉, 그 정도는 알고 있는 줄 알고 뽑았더니 업무 지식이 전무하더라 라는 답답하다는 내용이었는데, 그건 경력 입사자의 무능함 보다 직무에 맞지 않게 뽑고 배치한 면접관과 인사팀의 문제이다. 문제는 이직을 하면 다수의 팀장 혹은 동료가 바라보는 시선이 위와 같이 각박하다. 경력사원에 대해선 결과에 대한 평가만 존재하고 그 평가는 일을 잘해도 못해도 늘 나쁘다. 성과를 내고 인정받으면 오자마자 나댄다고 싸잡고, 조용히 지내면 무능하다고들 떠든다. 폐쇄적인 분위기와 파벌, 텃세의 역사는 조선시대에도 있어 왔기에 놀랄 것도 없다. 그래서 이직도 퇴사도 신중해야 한다. 회사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브랜딩일 뿐,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회사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최악의 두 팀장 스타일은 평범한 회사에서 그리 흔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고 90년 생들이 직장 내 주류로 발돋움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타인의 불운과 질 낮은 인성에 스스로가 휘둘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누구나 내가 겪은 일이 가장 힘들고 드라마틱하다. 타인의 일은 무엇이든 쉬워 보인다. 신입 간호사의 자살로 귀결된 '서울 의료원'의 태움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을 뿐 그들의 세계에선 이미 오래된 관행이었다.
샐러리맨이라는 타이틀을 뗀 지 3년이 되었다. 나의 2,30대 시절엔 직장 보단 직업이 있음에 감사했고 적성에 맞았던 내 업무가 즐거웠던 기억이 많이 남는다. 이직도, 퇴사도, 불편한 상사 혹은 동료와의 관계도 결국 선택은 스스로에게 달렸다. 주변 환경에 흔들리지 말라는 말보단 하고 싶은 대로 하되 그 이유가 타인이거나 주변 환경 때문이라면 잠깐이라도 숨 고르기를 한 후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 이야기하고 싶다. 꾹꾹 눌러 참다 터지느니 말이다. 그리고 마흔 초반까지 살아보니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실로 존재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