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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o Dec 17. 2019

영어가 너무 싫은 엄마들에게

땡큐 뽀, 오케이 라~면 어떠한가?

보름만 지나면 2020년 새 해가 온다. 가끔 브런치에서 영어 관련 글들을 읽다 보면 대부분 종국엔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된 이들의 조언과 그로 인한 베네핏과 경험담을 다룬 글을 보게 된다. 분명 성실한 노력으로 이룬 결과이기에 내심 부럽고 또 닮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나처럼 아이 엄마인 평범한 아줌마들 중, 영어를 잘하고 싶은데 계속 잘하지 못하고, 아쉽게도 학습능력 역시 뛰어나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도, 그래서 그런 이들 중 하나인 나도 재미있게 영어를 익힐 수 있다는 걸 공유하기 위해 많은 이들의 새해 다짐에 한 번쯤은 들어갔을 영어에 관한 내 부끄러웠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2주 후면 43세가 되는 나는 지난 시간을 돌아봤을 때, 마흔이 넘은 지금이 가장 영어를 잘한다. 잘한다는 기준을 두고 원어민 수준의 유창한 'Fluent English'로 오해하지 마시라. 내가 살아오면서 했던 영어 구사 능력 중 지금의 수준과 마인드가 최상위라는 의미이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파파고'와 같은 번역 앱을 틈틈이 사용하고 기본적인 어휘력으로 구사하고 있기에 누군가의 시선에선 형편없을 영어를 하고 있지만, 나에게 있어 영어란 타인의 시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영어라는 수단을 통해 내가 무언가를 얻거나 이야기하고 싶은 필요에 의해 쓰이는 것이기에 더는 누군가가 나에게 영어를 할 수 있냐고 묻는 질문에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는 나라의 국민답게 '조금'이라고 대답하던 과거과 달리 명쾌하게 '예스'라고 답을 하겠다.

'영어를 못했던 사유에 대한 구구절절한 긴 변명'

중학교에 입학하면 모두가 필수로 준비하던 '@@종합 영어' 세대이다. 내가 중, 고교 시절을 보낸 90년대 후반은 조기 유학 붐이 일었고, 대학 입학 후 '어학연수'라는 명목으로 장, 단기 유학을 떠나는 친구들도 점차 늘던 시절이라 영어를 잘하는 친구들도 꽤 많았다. 나 또한 대학 3학년 무렵 막연하게 목표도 없이 어학연수에 대한 환상을 품고 유학원을 알아보던 중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암수술과 그 이후 힘겨웠던 투병 생활을 지켜보며 생각 없이 살던 한심한 대학생활을 마감하고 아무것도 보여드린 것 없이 아버지가 떠나면 어떡하나라는 두려움에 정신 차리고 학점 관리와 취업 준비에 총력을 기울였던 시간이었다. 그 시절 내 영어 수준은 강남역 영어 학원을 다니며 급하게 만든 대기업 입사 지원이 가능한 토익 점수의 커트라인을 간신히 넘긴 수준이었다.

운이 좋았는지 내 간절함이 닿았는지 대학 졸업 직전, L그룹에 공채 입사를 하였고, 나의 직업은 '상품기획 MD'였다. 요즘은 워낙 다양한 분야에서 흔히 쓰이는 호칭이고 시장이 온라인으로 확대된 유통업과 소비재 제조 회사에서도 사용하는 흔한 직업 군 중 하나이지만 2001년 입사할 당시의 나는 이 호칭이 생소했다. 그저 아픈 아버지에게 떠나시기 전에 자식으로서 조금이라도 덜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안정적인 대기업의 명함을 보고 지원하였고, 직군에 관해선 별생각 없이 1 지망에 기재하였다.


앞서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듯 나의 첫 직장은 이 직군의 신입사원들에게 교육과 해외 경험에 대한 투자를 아낌없이 하였고 나는 입사와 동시에 기획과 일부 생산에 관여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유럽과 중국, 일본으로 매 년 6회의 시즌 별, 고정 출장을 가는 것이 업무에 한 부분이었다. 앞서 말했듯 나의 영어 실력은 강남역 학원에서 만들어진 급조된 수준으로 해외 출장 자체가 도전이었다. 다행히 함께 입사한 동료들과 선배들은 대부분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갖추고 있어 아주 중요한 미팅을 제외하곤 그들의 미팅 시 사용하는 영어를 쉐도잉 하며 상황을 넘기곤 했다. 이는 적어도 박람회와 현지에서 개인이 아닌 회사가 만들어 준 타이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느 회사나 비슷하겠지만 신입 혹은 2,3년 차 직원에게 해외 출장은 업무를 익히는 배움의 기회에 가깝지 중요한 의사결정을 진행시키는 회사는 없기에 그렇게 5년 간 선, 후배들의 도움 그리고 눈치껏 배운 간단한 무역 용어로 내 영어실력은 늘지 못한 채 흘러갔다.

결혼 후, 이직한 회사는 입사 당시 'S사'의 타이틀이 붙어있는 영국 합작 회사였다. 이메일부터 영어가 안 쓰이는 곳이 없었고, 더구나 기본적이라 해도 지금껏 사용해본 적이 없던 'FYI, BTW'같은 줄임말이 가득한 업무 메일을 처음 접한 경력 입사자에겐 혼란 그 자체였다. 업무용으로 만들어진 영어 줄임말을 익히는데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렸고, 당시 대표였던 영국 사장의 발음은 영화 '빌리 엘리엇' 아버지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겠더란 이야기이다. 추후에 그의 아버지가 정말 스코티쉬 광부였다는 말에 내가 그의 발음을 못 알아들은 점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근무 당시 이직한 회사에서 경력직 직원으로 적응에 어려움이 있었던 나는 아웃사이더는 아웃사이더를 알아본다고 한국으로 근무를 온 본사 영국 직원들과 자연스레 가까워졌고 그중, 파이낸스 책임자였던 A와는 지금도 자주 안부를 나눌 만큼 친해졌지만 이 관계는 나의 영국인 친구 A의 광속으로 늘은 한국어 실력 덕분이었다. 하여, 영국 회사에서의 4년 동안 나는 PT를 마치면 내용의 99%를 모두 까먹은 단기 영어 PT암기와 영어 이메일 붙여 넣기의 달인이 되었고, 해외 출장은 부하직원 복은 또 많아 영국에서 배우고 자란 후배들 덕을 보며 영어가 한 뼘도 성장 못한 시기였다. 아니 오히려 영국 회사의 직원으로서 영어로 된 욕만 배우며 더더욱 영어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분야가 확연히 바뀌었지만, 마지막 회사에서 역시 해외 사업과 관련된 업무였다. 나는 중국의 주요 포털사와 영상 콘텐츠 유통사에 한국의 드라마, 예능 콘텐츠 유통에 관련된 협찬과 커머스 관련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중국의 큰 기업의 팀장급 이상의 경우 미국에서 공부한 아이비리그 출신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들이 영어를 굉장히 잘하는 것을 알았지만, 업무 미팅 시, 일절 영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반드시 북경 표준어를 구사하는 통역을 통했으며, 우리 팀에서 가장 고생한 팀원은 팀장, 차장, 과장도 아닌 북경대 출신에 중국 거주 14년 차 신입 직원이었다. 보고서와 이메일, 커퍼런스 모두 중국어로만 진행했기에 우리 팀 막내는 입술이 터져가며 일을 해야 했고, 직속 선배로서 도움이 안 된 나는 후배에게 죄스럽기까지 했다. 이렇게 내 마지막 직장에선 영어를 쓸 일이 없자 그나마도 없던 영어 실력조차 더욱 떨어지며 끝이 났다. 다만, 중국인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펑요우(朋友)'문화에 새삼 놀란 것은 내가 회사를 퇴직 후, 보인 그들의 태도였다. 더 이상 업무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나와의 소통을 위해 VPN을 깔아야만 접속 가능한 소셜미디어의 계정을 만들고 인스타그램에 올린 아이의 임신 소식에 중국에서부터 출산 선물이 도착했고, 지금껏 아이의 성장 모습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꾸준히 인사를 전하곤 한다. 퇴직 이후, 그렇게 나는 중국인 친구가 생겼고, 그들은 안부를 묻는 메시지에 모두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럼 언제부터 영어에 관심을 갖고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였냐고 묻는다면 모두 올해로 3살 된 아이 덕분이다. 내 나이 앞자리가 4로 바뀌고 만난 아이와 나는 하고 싶은 일들도 가고 싶은 곳들도 너무 많았다. 이 못난이가 결혼 후, 무려 10년 만에 도착한 아이지 않은가? 임신 내내 아이와 함께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면 체력이 허락하는 50세 전까지 함께 가고 싶은 여행지가 많은데, 당장 이 모든 것들을 준비함에 있어 영어는 필수가 된 것이다.

그동안 대학원 졸업과 회사에서의 승진을 위해, 혹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그리고 수 없이 많은 시간 동안 자존심에 생채기를 주던 그 싫은 영어를 바라보는 관점이 아이 엄마가 되면서 즐거움의 수단으로, 꼭 필요한 도구로 바뀐 것이다.


해외살이를 하려면 적어도 물이라도 사야 하고, 음식을 주문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 거니와 아이가 아픈 비상 상황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의사의 지시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또, 내 아이가 혹은 다른 아이에게서 발생될 수 있는 불편한 상황에 대해 아무도 우리를 도울 이 없을 낯선 곳에서 엄마로서 아이를 지킬 수 있어야 하고, 억울하지 않을 정도의 대화는 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니 그때부터 진심으로 영어 공부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그렇게 내 영어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지금의 영어 배움의 환경은 흥미 자체를 잃게 만들었던 7포인트 글자 사이즈의 '@@종합 영어' 책이 바이블이던 시절과 달리 '유튜브(YouTube)’에 좋은 스승들도 많이 있고 콘텐츠들은 재미있고 풍부하며, 우리 집 노견 덕에 알게 된 다양한 국적의 인스타그램 속 사이버 친구들과의 소통을 위해 피드 업데이트 시, 짧은 문장이라도 영어와 혼합하여 쓰다 보니 영어는 더 이상 나에게 지겨운 존재가 아닌 일상에서 조금은 사용하게 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 상륙한 '넷플릭스(Netflix)의 오리지널 콘텐츠의 주 소재인 틴에이저용 영화들은 나에게 재미와 함께 일상 속 쉬운 표현을 익히는데 도움이 되었다.


당장 삼겹살을 먹으며 육즙이 터진다는 표현을 'juicy'한 단어만 배워도 될 일이거늘 그동안 배운 내 영어책들은 모두 너무 상투적인 'delicious'위주였는데, 그냥 쉽게 'it's so good.'만 써도 충분히 의미가 다 통한다는 걸 유튜브 속 해외스타들의 인터뷰를 보며 배웠다. 특히, 요즘 쓰는 한국말의 자연스러운 자막처리와 해외 스타들의 인터뷰 콘텐츠가 많은 유투버 '영국 남자'의 '데이비드 베컴' 한우 편을 보면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스타 베컴 씨가 한우를 먹으며 제일 많이 사용한 표현 역시 'it's so good.'이다. 그래서 나는 유튜브의 교육용 콘텐츠도 도움을 받지만, 내가 관심을 갖고 좋아하는 스타들의 인터뷰를 자주 본다.

'맛'에 관한 영어로 된 표현들이 많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편히 사용할 기회와 환경이 없다는 것이 영어 말하기 실력이 늘지 않는 이유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면 다들 알지 않은가? 입에서 안 나와 문제이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영어를 내 수준에 맞게 배우고 사용하기로 했다. 영어 교육 유투버들 중 '소피 반'이라는 미국 거주 한국 통역사 분의 계정이 있다. 나는 우아한 그녀의 계정도 좋아하지만, 그녀의 미국 초등학생과 유치원생 자녀가 운영하는 어린이용 영어 학습 계정을 좋아한다. 아주 짧게 'almond'같은 단어의 발음을 유치원생이 가르쳐주는데 나에게 도움이 되기에 그녀의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 유치원생도 배울 점이 있다면 나에겐 그이 또한 좋은 스승이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에게서 배우는 발음은 비록 영원히 똑같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어디를 틀리는구나를 알 수 있다.

그렇게 영어에 대한 관심을 지속하던 중, 드디어 예방접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아이가 만 두 돌이 된 시점에 아이와 함께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기' 여정이 첫 도착지인 쿠알라룸푸르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마침 '말레이시아 한 달 살기'의 열풍으로 잘 알려진 곳이기에 첫 여정 치고는 비교적 쉽게 숙소와 어학원을 구했고 아이는 이곳 유치원에, 나는 이곳 어학원에 등록하였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다시 학원생이 된 기분도 좋았다. 그리고 나의 어학원 생활에 대해 내 주변 이들의 우려가 담긴 질문이 시작되었다. 필리핀에 가면 '뽀'를, 말레이시아는 '라~'를 말끝마다 붙이는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이 글을 빌어 한번에 대답하겠다.

싱가포르에 가면 특유의 발음으로 불리는 '싱글리쉬'가 있고, 앞선 사례로 제시된 필리핀에 가면 '땡큐'에는' 땡큐 뽀'를 말레이시아에선 '오케이'에 '오케이 라~'를 붙여 말한다. 단언컨대 그들의 영어 발음이 우리가 표준으로 생각하는 영어와 확연히 다르지만, 그들은 영어가 제2 언어인 영어권 사용자이고 영어를 사용하는 우리네 생각의 영어 종주국 서양인들과 대화가 문제없이 통한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국제기구의 과거 종사자들 역시 일부는 정말 뛰어나지만, 일부의 발음은 사실 전혀 그렇지 못하지 않은가? 다시 말해 발음이 나쁜 건 어찌 보면 영어권 국가에서 태어나거나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이들에겐 당연한 결과이고, 간혹 인터뷰나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국내파 통역사들은 정말 뛰어난 이들이다.

지난주 수업시간에 매일 같이 치르는 등원 전쟁에 아들의 징징 거림에 관한 표현을 배웠는데 이 표현은 너무나도 유용해 금세 배우게 되었다." I can't stand it when my son throw a tantrum."그리고 그날 나는 이 표현을 키즈 카페에서 만난  비슷한 또래 아이를 둔 말레이시안 엄마에게 하게 되었고, 우린 그것을 기점으로 친해졌다.

영어 좀 틀리면 어떠한가? 시제가 또 틀리면 어떤가? 아예 안 쓰고 입을 영원히 다무는 것보단 낫다. 우리가 간혹 방송을 통해 한국말이 유창한 외국인들도 보지만, 그들은 실력자이기에 방송도 나온 것이고, 다수의 외국인들은 어눌한 한국어 발음을 갖고 있듯 내 엉망진창 발음도 경우에 따라선 상대가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그러니 우리가 동남아시아 영어 발음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보단 그들은 서양인들과 문제없이 소통하니 내가 필요한 영어는 그 이상도 아니기에 나는 내 방식의 이 느리지만 즐거운 영어 말하기의 길로 갈 것이다.

이길로 가다 보면 어쩌면 나도 환갑 전엔 선망하던 'Native speaker'에 가까워질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서점가에 있는 '며칠 만에 영어 완성' 같은 책들이 나와 같은 영어 잘 못하는 이들을 현혹하는 게 심히 우려스럽다. 그렇게 정말 다수의 사람들에게 단기 속성으로 영어를 가능케 했다면 그 책은 교육 부분의 노벨상 아니 그 이상의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고 더 이상의 어학원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지난 두 달간. 비록 정규 어학연수 과정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혼자 배우던 영어를 짧은 시간이나마 수업을 통해 궁금했던 표현을 배우고, 또 이곳에서 지내며 Grab을 타고, 커피를 주문하고, 약국을 가며 늘 영어를 접하고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경험해 본 것이 너무 좋았다. 내가 이곳에서 사용한 영어의 절반은 틀렸을 것이다. 그럼 또 어떠한가? 틀리면서 배우는 거지. 내 비록 학창 시절과 직장 생활 동안 영어 잘한다 소리 한번 못 들었지만, "할머니가 영어를 참 잘하시네요."라는 칭찬을 목표로 즐겁게 내 영어의 길을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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