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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o Dec 22. 2019

어쩌면 외국인 친구라서 더 편한 비밀 이야기

쿠알라룸푸르에서 만난 말레이시안 친구 제이미

무슬림의 나라이지만 그 어느 곳 보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화려한 쿠알라룸푸르에서 지낸 지 두 달이 지나 어느덧 12월의 끝자락이다. 결혼 후, 지난 10여 년 간 처음으로 길게 떨어져 본 시간이라 남편은 내 잔소리에서 해방이라며 잘 지낼 수 있다는 호기롭던 모습은 어디 가고, 나와 아이가 한국을 떠난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부터 심심하고 외롭다는 말이 슬슬 나오더니 결국 일정보다 일주일을 앞당겨 항공권이 최고로 비싼 크리스마스에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한다.

매일 낮에 공원에서 산책을 해야 하는 반려견을 위해 강아지마저 조카의 집에 간 후라 텅 빈 집에 들어서면 괜히 서글퍼 아이 이름도 한번 불러보고, 술 약속도 빨리 들어오라는 잔소리가 없으니 안 가 지더란다. 매 년 연말이면 송년회로 술자리를 이어갔을 남편의 갑작스러운 변심에 왜 이리 빨리 오냐, 그 값을 치르고 항공권을 타는 호구가 너였다며 핀잔을 줬지만 두 달 만의 만남은 내심 반갑기도 하다. 설렘을 주던 오빠는 세월이 흘러 쓰레기 분리수거를 해 주는 아저씨가 되었지만, 선약 없이 매일 만날 수 있는 제일 친한 친구이니 말이다.

모처럼 아이를 재운 후,  통화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이곳에서 친해진 말레이시안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니 남편은 어떻게 외국인과 우연히 친구가 될 수 있냐며 신기해했고, 도대체 둘이 무슨 공통점이 있어 친해질 수 있냐고 물었다. 오늘은 꾸준히 자주 볼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알기에 어쩌면 더 마음 편히 비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던 외국인 친구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말레이시안 친구 '제이미'를 만난 건 키즈 카페였다. 몽키아라에서 지내며 아이와 하원 후, 한주에 한번 정도는 실컷 뛰어놀 수 있는 키즈카페에 데려갔다. 말레이시아는 연 중 더운 날씨로 인해 아이들의 야외 활동이 제한적이라 실내 놀이터가 발달되어 규모가 좀 있는 쇼핑몰엔 어김없이 키즈카페가 있고, 시간제한도 없어 아이와 키즈카페에 들렸다 중간에 밥을 먹으러 외출해도 재 입장이 가능한 구조이다.


말레이시아의 키즈 카페들

내가 살고 있는 숙소 바로 옆에도 있지만 규모가 너무 커 한시도 시선을 뗄 수 없는 3세 아이를 시야에서 놓치기 십상이라 그날은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고 평소 내가 좋아하는 '방사르 빌리지(Bangsar Village)'에 위치한 키즈 카페에 갔다.  

이곳의 키즈 카페는 규모가 작아 주로 인근에 거주하는 아이들이 찾는 곳인데 미끄럼틀을 줄을 잡고 등산하듯 올라가는 형태라 처음 방문한 우리 아들은 못 올라가고 쳐다만 보고 있자, 귀엽게 생긴 또래의 아이가 다가와 천천히 올라가는 법을 알려주었다. 아이들끼린 그들만의 언어가 있는지 아들은 금세 알아듣고 친절히 설명해 준 아이를 따라 신나게 뛰어놀았다. 그 모습이 고마워 아이의 엄마에게 아이의 친절한 성격을 칭찬하며  우리는 처음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제이미'라고 소개했고, 다민족 국가인 말레이시아 답게 페낭이 고향인 중국계 말레이시안이다. 귀여운 그녀의 아들은 우리 아이보다 1살 더 많았고, 우리는 아이들 이야기를 나누며 따로 앉아있던 테이블을 어느새 합치게 되었다. 아이들 이야기며 한국에서 이곳 쿠알라룸푸르에 온 이유 그리고 이곳의 카페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제이미 역시 나처럼 맛있는 커피와 카페를 가는 걸 좋아해 우리는 다음엔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방사르 인근의 멋진 카페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이국땅에서 처음 만난 낯선 그녀지만 또래의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공통점과 타고난 목소리가 다소 커 늘 부러워하는 차분한 목소리를 갖은 그녀의 단정한 분위기가 처음부터 호감이 갔다.

키즈카페에서 처음 만난 날 저녁부터 메시지와 이메일이 오가던 그녀와 어학원 수업이 없는 날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우리는 '방사르(Bangsar)  지역에서 유명한  'PULP CAFE'에서 만났다.

 'PULP CAFE' 혹은 ‘PPP CAFE’ 로 불린다

다시 만난 그녀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작은 선물로 한국에서 챙겨 온 과자들과 중국계 말레이시안이니 스팀 라이스를 먹을 것 같아 '아이용 저염 김'과 '김자반'을 준비해 서둘러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그녀는 시간보다 일찍 도착 해 있었다. 제이미가 추천해 준 플랫 화이트와 팬케이크를 주문하고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것처럼 편안한 그녀와 대화를 이어갔다. 제이미의 아들은 '계란 알레르기'가 있어 식사 때마다 걱정이 많은데 내가 준 '김자반' 선물을 너무 좋아했다. 싱가포르와 호주에서 공부한 그녀의 남편과 그녀는 집에서도 영어만 사용해 중국어보다 영어가 더 편한 이라 내가 조금 부족한 영어를 구사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대화에 문제가 없었다. 내가 '김자반'에 대해 아이가 있는 집에선 게으른 나 같은 엄마들을 위한 비상식량  'emergency food'라고 말하니 그녀가 정말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며 그녀는 내게 카야 잼이 발라진 맛있는 빵을 선물했다.

첫 만남에서 '김자반'으로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세 시간 동안 남편들 이야기며 온갖 집안 이야기까지 나누며 끝없이 이어졌다. '제이미'는 우리 아이 또래의 막내아들뿐만 아니라 영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두 딸이 있어 서로가 나이를 묻지 않았지만, 우리 둘 다 늦은 나이에 어린 아들을 키우는데 따른 체력적인 어려움을 토로했고, 아이를 갖고 오랜 샐러리맨 생활을 마친 나와 계란 알레르기가 있어 식사 준비를 반드시 집에서 해야 하는 막내아들을 위해 유연 근무제를 택한 그녀와 사회에서 일하며 겪었던 문제에 대해 공감대가 많았다.

대화가 깊어 갈수록 '제이미'는 어쩌면 그녀 주변에 잘 털어놓지 않았을 이야기를 먼저 편안히 꺼내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녀에게 지난 과거에 겪었던 부당했던 경험 혹은 고민이 너무도 쉽게 나왔다. 국적도, 나이도 다른 그녀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실컷 나누고 즐거울 수 있을까?

왜 였을까?

가장 가깝다는 친구, 선후배들에게조차 어떤 사안을 말하고자 할 때, 다음에 이 사람을 만날 때, 혹은 집에 돌아가 후회하지 않을 이야기들로 수위 조절을 한다. 어쩌면 내 이야기가 못난 것 같고 그런 모습에 내게 소중한 이들에게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이란 전이되기에 나 역시 지인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괴로운 이야기 보단 즐거운 이야기로 채워지기를 바란다. 그런데 살다 보면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 비밀 이야기가 하나쯤은 있을 터인데 우연히 키즈 카페에서 만난 말레이시안 친구 '제이미'와는 그런 조심스러웠던 이야기를 진지하지만 편히 나눈 것이다.

다음 달이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그전까지 몇 번의 커피 데이트가 남았지만, 우리가 다시 이렇게 커피 한 잔을 마주하고 같은 공간에서 대화를 나눌 일이 앞으로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서로 잘 알고 있다. 그 점이 우리를 어떤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말 안 듣는 3세와 4세의 아이들 덕에 그리고 진한 커피를 좋아하는 취향이 우리를 친구로 만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마음 후련히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리라곤 예상 밖의 일이었다.

마흔이 넘도록 살아오며 한 번씩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더라. 물론 남편과 친구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냥 좀 부끄러운, 혼자만 알고 지니기엔 무거워 털고 싶었던 이야기들 말이다. 그날의 내 외국인 친구 '제이미'와의 만남은 마치 '삼국유사'의 경문왕 설화 속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수 있는 그런 '대나무 밭'과 같았다. 이야기는 다행히도 유창한 수준이 아닌 내 영어 실력으로 자체 조절은 되었지만 말이다.  


살아가며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끊임없이 평가를 받는다. 평가의 대상과 공간이 다를 뿐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사장, 좋은 팀장, 좋은 선후배, 좋은 딸, 좋은 친구, 좋은 이웃.


사회적 잣대에 맞춰 누구나 이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때로는 그런 척 연기하는 비겁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 속에 살아가기에 당연한 일이고 그로 인해 사회가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 이리라.


잠시 낯선 이국땅에서 외국인으로 지내며 그런 시선이 아닌 곳에서 홀가분하게 내 모습을 들여다본 것은 큰 기회였다. 그리고 나이와 학연, 지연이 아닌 커피 취향이라는 단순한 이유로도 국적에 관계없이 친구가 될 수 있고 그 관계가 주는 즐거움도 알게 되었다. 이번 여정을 통해 자주 드는 생각은 나이가 들수록 몸은 궂어져도 생각은 좀 더 유연해지도록 해야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오픈 마인드' 말이다. 정확한 표현은 'open minded' 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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