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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o Apr 29. 2020

‘관상 is 사이언스’

시대를 앞선 ‘다산 정약용’의 ‘상론(相論)’

가까운 지인의 생일이 다가와 그녀가 향수를 모으는 취미를 알기에 선물을 사러 모처럼 백화점 외출에 나섰다. 아직은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이 시행 중이고 오픈 시간대라 백화점 주차장은 한가했다. 순차대로 바로 주차하면 될 정도로 주차 공간도 여유가 있어 주차 중인 앞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정적을 깨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파란색 차 한 대가 공회전을 하며 내 앞의 차 뒤쪽으로 왔다. 한 바퀴 크게 돌아 출구 쪽으로 출차하면 될 것인데 일정이 바쁜지, 아니면 마음이 급했는지 차들이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으로 바로 오다 보니 주차 중이던 내 앞 차가 본의 아니게 요란을 떠는 파란색 차를 막은 꼴이었다. 길어야 이삼 분 정도만 기다려 주면 될 일인데 요란스러운 파란색 차는 창문을 내리더니 주차 중이던 앞차 운전석을 향해 눈을 사납게 부라리기 시작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검정 마스크까지 한 낯선 이의 살기 어린 눈빛에 뒷 차인 나도 기분이 상했는데, 그 기분 나쁜 눈빛을 고스란히 받은 앞차 차주는 오죽 당황했으랴. 파란색 차주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계속해서 눈빛을 쏘아 댔고 앞차는 운전석 쪽 주차 간격을 조금 더 확보하기 위해 서너 차례 차를 더 앞뒤로 움직인 뒤에 주차를 했다. 주차가 마무리되자마자 내내 살기 돋던 눈빛의 파란색 차주는 쌍시옷 감탄사를 내지르곤 굉음을 내며 출구로 향했다. 다행히 마스크를 쓴 덕에 육두문자를 내지른 그의 입모양새가 정확하게 보이지 않아 욕설의 수위를 알 수 없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주차 내내 불편은 시선을 한껏 받던 앞차를 지나 대각선에 주차를 하고 내리는데 앞차 차주가 차 뒷문을 열고 낑낑대며 씨름하고 있었다. 그녀는 뒷 자석 카시트에 탄 아이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나 또한 매일 아이를 카시트에 태우고 내리는 입장이다 보니 앞차 차주에게 괜스레 마음이 쓰였다. 운전석 뒤에 탄 아이를 내리려면 주차 공간의 확보가 좀 더 필요하다. 때로는 타기 싫다 발버둥 치는 아이를 태우고 벨트를 채우는 일에 진땀이 나기도 한다. 한 손에는 돌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 유모차를 펴고 있던 아이 엄마를 보니 주차 내내 불편하게 굴었던 파란색 차주가 너무도 괘씸했다.

주차장 해프닝으로 다운된 기분을 전환하고자 카페에 앉아 커피를 주문하고 스마트폰 뉴스 기사를 뒤적이며 카페를 둘러보니 책장 한 편에 요즘 역사책 다시 읽기를 하며 푹 빠져 있던 실학자 ‘다산 정약용 (茶山 丁若鏞, 1762~1836년)’의 ‘상론(相論)’에 관한 책이 있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다시없을 천재이자 늘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방안을 살피고 청렴하고 강직했던 다산이 ‘상론(相論)’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에겐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명과 직업은 없다는 것이었다. 다산은 생긴 대로 노는 것이 아니라 노는 대로 생긴다고 일렀다. 이는 타고난 꼴보단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언행을 하는지에 따라 얼굴이 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기록에 따르면 다산은 어린 시절엔 눈썹 부위에 천연두 흉터가 생겨 눈썹이 세 개라는 뜻으로 '삼미(三眉)'라는 별명도 있었지만, 성인이 되어선 정조가 그의 흰 피부와 고운 용모를 칭찬한 만큼 훤칠한 인물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19년이라는 길고 길었던 억울하고 답답한 유배 생활에서도 신세를 한탄하기보다는 낙후된 유배지에서도 지역민의 교육에 힘쓰고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한 시대의 역작이라 평가받는 저서들을 쉼 없이 편찬했던 걸 보면 그는 타고난 용모에, 누구보다 아름답게 살아온 인생의 향기가 더해져 귀한 상이 었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6대 직계 후손이라는 배우 정해인

우리는 노화가 두려워 끊임없이 피부과 시술을 하고 비싸다는 안티 에이징 화장품을 사들이면서 정작 인상을 반복적으로 찌푸리고 서슬 퍼런 눈빛을 하는 것에 대해선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다. 하루 중, 운전을 하는 시간만 놓고 보아도 얼마나 수 없이 못나고 험한 얼굴을 했던가. 나 역시 때로는 주차장에서 쩔쩔매던 앞 차의 아이 엄마기도 했고, 눈을 희번덕이던 파란색 차 주 이기도 했다. 미팅에 늦거나 급한 일이 생겼을 땐, 나도 누군가의 서툰 운전에 인상을 구겼고, 무단 횡단을 하는 이들에게 가자미 실눈을 뜨곤 했다. 그런데 그 매서운 눈빛과 표정이 실로 못나게 만드는 건 앞차도 무단 횡단자들도 아닌 내 스스로의 모습인 것이다.

오늘자 신문의 헤드 라인은 국민적 분노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 N번방, 또는 ’박사방’이라 불리는 사건에 추가로 공개된 공범자의 신상이었다. 신문사 별 기사 내용은 조금씩 달라도 댓글마다 어김없이 상위에 올라와 있던 댓글은 ‘관상은 과학’이었다. 분명 피를 나눈 형제도 아니요, 심지어 서로가 일면식도 없다는데 모두 비슷한 눈매에 놀라는 댓글이 주를 이뤘다. 무려 258년 전에 태어난 조선의 최고 석학 다산의 ‘상론(相論)’은 ‘수원화성’의 개방 시간을 인공지능 ‘챗봇’이 알려주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2020년에도 들어맞는 이야기였다.

언젠가부터 연말에 가까운 지인들에게 송년 인사를 보낼 때, 내가 마지막으로 즐겨 쓰는 말이 ‘오래 보고 곱게 늙자’이다. 곱다는 것과 아름다움은 같은 것 같으면서 결이 다르다. 남편에겐 90세가 넘은 할머니가 계신데 우리 부부가 ‘이쁘니 할머니’라 칭하는 분이다. 눈도 많이 어두우시고 귀도 잘 들리지 않으셔도 자그마한 체구에 늘 깔끔하게 빗어 쪽진 머리를 하신 그 은색 머리칼과 자태가 너무 고와 시집와 처음 있던 어버이날에 건강식품과 함께 반짝이는 머리핀을 선물해 드렸다. ‘망백(望百)’이라 불리는 91세의 할머니에게 아름다운 여인의 필수 요소라는 희고 고운 피부가 있을 리 없지만, 평생을 단정하게 살아오신 몸에 밴 기품과 늘 빙그레 미소 짓는 표정이 그대로 주름진 얼굴에 남아 할머니를 만나면 곱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남편에게 이쁘니 할머니는 어찌 저리 곱냐 물으니, 매사에 화가 없고, 낙천적이신 분이라 그런 것 같다고 한다. 오늘 아침 주차장에서 보았던 무섭고 사나워 보이던 파란색 차주도 처음부터 그리 험한 상이 아니었을지 모를 일이다. 오늘 나는 스스로에게 어떤 생김새를 주었을까?


신진 아티스트 임소현 작가의 그림과 우리집 반려견 김구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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