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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o Jun 10. 2020

며느리의 힙합, 시어머니의 찬또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

가는 인연 잡지를 말고~

오는 인연 막지 마세요...


지난 주말에 뵈었던 시어머니는 웃음 띤 얼굴로 콧노래를 즐겁게 흥얼거리시며 그 어느 때 보다 행복해 보이셨다. 늘 조용한 분이셨는데, 시집와 10여 년이 넘도록 지금처럼 밝고 즐거워 보이신 적이 없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군 입대를 앞둔 큰 손자 걱정과 늦둥이 막내 손자의 재롱에 빙그레 웃으시다가도 "어머니, 요즘 찬또는 어떻게 지내요?"라는 내 질문에 눈빛을 빛내며 찬또라 불리는 가수 '이찬원'의 근황을 한 톤 높은 음성으로 전하는 모습은 첫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로 돌아가신 듯했다.


얼마 전 읽은 '윌리암 새들러(Sadler, William)'의 책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 은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과 나이 들어감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어떠한 마음가짐이 필요한가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책에 따르면 생애 주기를 성장과 생산성의 시기를 지나 마흔부터 칠십 세 까지가 '서드 에이지'라 불리는 때인데 이 시기를 은퇴자의 삶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두 번째 성장의 시기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서드에이지에 속하기에 어떤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를 장착하느냐에 따라 남은 삶의 질이 변한다는 저자의 이야기는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하게 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나이에 맞는 편견을 지속적으로 주입해왔다. 중년을 위축시키는 것은 지나간 세월과 노화된 모습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 놓은 통념이라는 것이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100세 시대를 처음 맞이한 우리는 젊음을 강조하는 미디어의 세뇌 덕에 외적 젊음의 유지를 위한 것들에만 치중할 뿐, 정작 이 나이 때에 맞는 취향과 여가활동에 대한 제안도 없고, 길어진 생애주기만큼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싶은 나이임에도 기회는 부족하기만 하다. 그저 이 나이에 골프 정도는 쳐야 하고, 차는 이런 차를, 가방은 이 정도는 들어줘야 하는지와 같은  온통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만 중시하다 정작 나 스스로가 좋아하는 것이, 취향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느냐 묻는다.


중학교를 다닐 무렵 이성 친구에 대한 관심과 이유 없는 반항으로 대변되는 또래의 사춘기와 다르게 취향의 허영으로 그 시절을 지냈다. 독서실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한 시간보다 이어폰을 꼽고 라디오를 듣는 시간이 더 길었고, 용돈이 생기면 조동진, 봄여름가을겨울, 김현철, 장필순, 이소라 등 '동아기획'이라는 특정 기획사의 음반들을 사 모았다. 팝송 역시 '머라이어 캐리'와 '보이즈 투 맨'의 노래가 강남역 6번 출구에서부터 들리던 시기에 나는 우울하기 짝이 없는 '펄 잼(Pearl Jam)'과 '라디오 헤드(Radiohead)'의 음반을 책가방 앞 주머니에 들고 다녔다. 나는 분명 '서태지와 아이들' 그리고 '듀스'를 좋아했지만, 동아기획의 음반을 그리고 음침한 '어터너티브 락'을 들으며 또래 친구들보다 꽤나 수준이 높은 양 허세를 부렸다.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한 가지 다행인 건, 취향이라는 게 태어날 때부터 갖추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험 속에 나와 제일 잘 맞는 것을 찾아가듯이 그렇게 주입식 교육처럼 억지로 난해한 음악까지 귓속으로 밀어 넣은 끝에  나는 내 취향을 정확히 찾게 되었다.


내 취향은 힙합


늘 예의 바른 태도와 단정함으로 아끼던 인사팀 신입 사원과 퇴직 전, 갖은 술자리에서 요즘 출근길에 제일 많이 듣는 노래가 무어냐는 물음에 '프라이머리'의 '독 (Feat. E-Sens of 슈프림팀)'이라 답하자 신입사원이 깜짝 놀라며 그는 취준생 시절 듣던 노래인데 본인과 띠동갑도 넘는 나이의 내가 즐겨 듣는 노래일 꺼라 생각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태교는 '모차르트' 대신 '쇼미 더 머니'로,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우유를 먹이며 '고등 래퍼'를 즐겨 보았다. 주위에서 '노산'이라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겠다며, 아이가 커서 무엇을 하면 좋겠냐는 질문에 사실 무얼 하든 즐겁게 사는 아이였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지만, 콕 집어 직업을 묻는 이들에겐 '래퍼'가 되었으면 한다는 내 진심을 진심으로 듣는 이가 없었다. 책을 읽으면 많은 걸 습득하고 느끼는 바가 많은 것처럼 나는 래퍼들의 가사에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기도 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나태해질 때쯤, 내 마음을 들킨 듯한 가사를 들으며 다시금 마음을 다 잡고, 독박 육아에 지칠 때면 다정다감한 남자 친구 음색의 래퍼 '로꼬'의 음반을 들으며 긴 하루를 마감했다. 중학교 입학 전까지 바이올린을 배웠고, 요즘도 종종 클래식 기타 음반도 사고, '콜드 플레이'와 '애드 시런' 도 좋아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은 힙합이다. 다행히 아무도 힙합이 젊은이들만의 음악이라 특정하지 않았고 취향의 선택은 자유이니.


시어머니의 '찬또' 덕질


다시 책의 내용으로 돌아가 저자는 축복이자 저주라 불리는 초 고령화 시대를 맞은 우리 세대가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살아온 시간만큼 남겨진 긴 인생의 후반기를 지루하게 보낼 것이고, 마음가짐을 바꾼다면 '중년'이라는 시기도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는 '가능성의 시간'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특히, 그간 헌신했던 가족과 직장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도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라 전했다. 우린 모두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것들에 무게 중심이 모여 있는 한국 사회를 살고 있다. 그래서 중년에라도 스스로에게 진짜 취향을 선택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말이 없고 늘 점잖던 시어머니에게서 본 소녀같이 수줍은 미소는 자식이 아무리 효도를 한들 볼 수 없던 미소였을 것이다. 좋아하는 가수의 방송 스케줄을 줄줄 외우시고 재방까지 챙겨 보시며, 처음으로 내게 어렵게 꺼내신 부탁이 다름 아닌 그 가수의 신곡으로 컬러링을 해 달라는 부탁이셨다. 나는 그런 어머님이 낯설지만 좋았다. 74세의 할머니라고만 여겼던, 그래서 취향이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어머님의 모습에서 '덕질'이라는 여가 활동을 보았고 그 시간만은 그녀가 배우자나 어머니가 아닌 그저 즐겁게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를 자유로이 즐기는 이로 보였다. 특정인을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좋아하는 걸 '덕질'이라 칭한다는데 대상을 떠나 스스로가 가치를 부여하고 관심과 열정을 갖는다는 건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시간보단 값지다 여기기에 덕질이란 단어가 나쁜 뜻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머니의 덕질 입문 덕에 우린 예전보다 더 많은 대화가 오갔고, 나는 어머니 덕에 가수 '이찬원'의 데뷔 전, 전국 노래자랑 영상까지 모두 보게 되었다.


37편의 영상만으로 유튜브 구독자 55만 명 에 달하는 인기 유투버 '밀라논나' 장명숙 님의 나이는 곧 칠순을 앞두고 있다. 주로 그녀의 전문 분야인 패션에 대한 지식과 쇼핑팁을 영상에서 담고 있는데 그녀의 영상 중, 두고두고 되뇌게 한 제목이 있었다.


'왜 젊어 보여야 해요? 산뜻하면 되죠!


그동안 옷과 화장품을 고를 때, '어려 보인다, 젊어 보인다'가 선택의 기준이 되어왔던 것들이 얼마나 촌스러운 생각인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 문구였다. 나이 들어감을 받아들이되 '이 나이에' 같은 사회적 통념을 떨쳐버린다면 남은 인생 후반기도 즐겁고 설렐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반백의 호호 할머니가 되었을 때에도 내 취향이 힙합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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