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성대 흑백의 기억
1974년 8월, 나는 낙성대에 있었다.
스트라이프 반팔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사파리 모자를 눌러쓴 네 살 아이.
활짝 웃는 얼굴로, 거북이 형상의 석상 위에 세워진 비석을 등지고 서 있었다. 비석에는 ‘고려강감찬장군’이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 안 보이는 글자는 사적비였다)
돌바닥 위에서 나는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강감찬이라는 이름의 무게도, 그가 살아냈던 시대의 의미도 모른 채, 그저 어른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나선 한 여름날의 풍경 속에서.
사진은 흑백이지만,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흐릿한 색을 품고 있다. 햇살은 강했고, 모자 아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돌바닥의 차가움과 묵직한 거북이상의질감, 그 위에 쓴 비석의 글씨는 지금도 내 안에 또렷하다.
지금 그 사진을 다시 꺼내보면, 그 아이가 서 있던 자리 너머로 시간이라는 강이 조용히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아직 세상의 무게를 알지 못했던 그때의 나.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웠지만, 동시에 선명하고 자유로웠던 그 시절.
사진은 아무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 흑백의 한 컷 안에서 늘 같은 말을 듣는다. “너는 그때, 그곳에 있었다. 지금도 잘 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