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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력서에 쓰지 못한 나의 이야기

견디며 살아내고 있는 시간들

by 제이림

1. 회사원으로 살아낸다는 것

Speyside - Easter Elchies House


나는 회사를 자주 옮긴 편이다.

KFC에서 시작해 생명보험, 위스키, 럼, 담배, 커피, 그리고 조명까지.


업계는 달랐지만, 내가 다뤄야 했던 브랜드와 고객은 비슷했다.


그래서 옮길 수 있었고, 옮겨야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더 나은 연봉, 더 나은 기회를 따라 움직였다.

누군가는 로열티가 없다고 했지만,

나는 내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


브랜드에 애정을 갖고 더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싶었다.

하지만 늘 ‘비용’이라는 현실 앞에서 그 열정은 무뎌졌고,

나는 점점 지쳐갔다.


그 마지막은 조명회사였다.

조명과 커피를 접목해 신개념 카페 프랜차이즈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그 꿈도 회사 매각과 함께 끝이 났다.

사장의 손을 떠난 회사는, 나를 더는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긴 공백을 맞이했다.


퇴직금으로 받았던 돈은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아내와 딸은 말은 없었지만,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이제는 뭔가 하겠지”라는 눈빛을 읽었다.


무언의 압박.

가족이기에, 더 아픈.


나는 감정을 눌렀고,

내 안의 쪼그라든 자존심을 달래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뭐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브랜드를 다루는 일이 익숙했다.

한국 시장 정서에 맞게 트렌드를 해석하고,

그 브랜드를 가장 돋보이게 조율하는 일.

하지만 결국… 나는 ‘조율자’였지, 창조자는 아니었다.


그 무기력함이,

가장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내가 잘 아는 걸 써보자’고 생각했다.

글을 써본 적도 없었고,

막막했지만,

내가 몸담았던 업계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때 한국엔 카페 창업 열풍이 불고 있었다.

커피회사에서 마케팅과 점포개발을 했던 내 경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다소 과감하게…

“카페지옥.”

그 단어에는 내가 보고 겪었던, 그리고 사람들이 몰랐던 참혹한 현실이 담겨 있었다.

이건 누군가를 말리기 위한 책이자, 정말 준비된 사람을 돕기 위한 책이었다.


회사 밖에서 내가 처음으로 시작한,

생산적인 일이었다.


500권도 못 팔았지만…

그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나는 다시 ‘나’로 존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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