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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 한 장의 진심

I give one

by 제이림

1990년 여름, 열아홉의 나는 처음으로 미국에 갔다. 공부하러 떠나는 유학길이었지만, 마음은 들뜨지 않았다.

그해 4월, 외할머니께서 큰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아직도 사건현장과 버스번호가 기억이 난다.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사거리에서 절에 가시려던 할머님은 횡단보도를 다 건넌 지점에서 버스에 치이셨다. 그 버스는 710번, 지금은 사라진 노선이다. 개포동에서 정릉까지 운행하던 버스였다.


나는 병문안을 다니며 조용히 출국을 준비했다. 출국 당일, 할머님은 공항에 나오지 못하셨다.

병상에 누운 채로, 그저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만 남기셨다. 하지만 떠나기 전, 할머니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나를 챙기셨다. 할머니는 병원침대 위에서 구운 김을 이모에게 시켜 가지고 오게 하셨고, 비닐봉지에 김을 곱게 담고, 라이터 불로 입구를 살짝 녹여 밀봉하셨다. 그땐, 밀봉된 조미김이 막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시절엔 할머니의 그런 방식이 흔한 보관법이었다.


1980년 (나와 할머니)


“거긴 이런 거 없을 거야. 밥 먹을 때 생각나면 꺼내 먹어.”

할머님의 손끝에서 전해지던 그 따뜻한 정이,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큰 응원처럼 느껴졌다. 김포공항은 가족과 친지들이 열 명씩 배웅을 나오는 풍경이 익숙한 시절이었다. 인천공항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해외여행은 여전히 ‘큰일’로 여겨졌다. 나는 짐을 끌며 게이트를 향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잘 다녀올게요, 할머니.”


비행기 창밖으로 천천히 멀어지는 서울을 바라보며, 나는 무언가를 두고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설렘보다도, 익숙한 것들을 등지는 두려움이 더 컸다. 이 비행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그 끝에 어떤 내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탔던 항공편은 대한항공이 아니라 Northwest Airlines이었다.


서울에서 뉴욕까지 직항이 없어서, 중간에 연료를 보충하기 위해 알래스카의 쥬노 공항에 착륙했다.
낯선 공항에서 우리는 비행기에서 내려 대기했고, 나는 면세점을 둘러보다 생고기 큐브를 시식해보기도 했다. 무슨 고기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디딘 곳은 바로 알래스카였다.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JFK 공항에 도착했다.

서울을 떠난 지 20시간 가까이 된 것 같았다.


긴 줄을 지나 세관을 통과해야 했고, 내 캐리어 속엔 할머니가 싸주신 검은 비닐봉지들이 있었다.

세관원이 내 가방을 살펴보더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봉지를 쳐다봤다.


“What are these plastic bags? What’s in it?” (비닐백안에 뭐가 들은거냐?)

나는 당황한 채 더듬거렸다.

“...it’s… it’s food…”(음식이다)


그는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에게 손짓했다.
“Hey, Chen, take a look at these bags… do you know what these are?” (야~ 챈 이거 뭐냐?)

중국계로 보이는 직원이 다가와 봉지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Well… looks like it’s dried seaweed. It’s very delicious side menu for rice.” (그거 김이야)


그 말을 듣고 안도한 나는, 무언가라도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봉지를 내밀며 말했다.

“I give one.” (옛다 하나 먹어라)


그 서툰 영어 한마디에 세관원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감성을 조금 깨는 얘기지만, ‘give’는 영어 문법상 목적어를 두 개 필요로 하는 수여동사다.
(예: I give you one.) 그런데도, 그 순간에는 그런 문법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처음 느꼈다. 언어는 완벽하지 않아도, 진심은 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그 순간을 떠올린다. 비록 서툰 표현이었지만, 마음을 담았던 그 한마디—


그게 낯선 땅의 첫 관문에서 나를 통과시켜 준 열쇠였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마음으로 살아간다.

진심이 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안고서.


중앙공원 어딘가.. (Central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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