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저는 공부를 사랑했습니다
공부가 나를 배신하고 있었다...
열흘전까지 나는 MBA의 두번째 학기 중간고사 기간을 지나는 중이었다. 경영학에는 아예 문외한이었던 데다가, 체력도 예전같지 않고(나이탓이겠죠 ㅠㅠ), 올해 내내 속시끄러운 상황이었던 지라, (부끄럽지만) 매번 중간, 기말 고사 시간을 지날 때마다 엄청 끙끙거렸다. 솔직히 충격이었던 게, (역시 부끄럽지만) 내 평생 '공부'에 있어서만큼은,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남들에게 뒤지지 않았다고 (남몰래) 자부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쉽지 않았던 거다.
공부가 쉽지 않다니! 운동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그닥 뛰어난 피지컬을 갖고 있지도 못한 내가, 어쩌면 유일하게 꾸준히 잘 해왔던 공부가, 공부마저, 나를 배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내가 공부에 뛰어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 어떤 공부는 뒤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자부심마저 무너진다면, 도대체 내가 쥐고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덜덜 떨리던 손... 이건 정상이 아니야.
그러던 어느날. 모 수업의 약식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화상 수업 전에 5분 정도 두어문제를 오픈하고 답을 적어낸 리포트란에 올린 다음 수업을 시작하는 방식이었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냥 가볍게 지나가면 될 일이었다. 삼십분 전부터 손발이 차가워지고 목뒤가 뻣뻣해지고 심장이 미친듯이, 정말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징후였다. 어? 왜 그러지? 당황스러웠다. 진정하려 하면 할수록 심장은 더 터질 듯이 뛰었고, 마우스 위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5분동안 나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손으로 덜덜 떨면서 문제를 풀었고 어이없는 실수를 했다. 마우스를 움직이고 클릭하는 손이 벌벌 떨리는 것을 한참동안 봤다. 어이없는 실수와 함께 답안을 내고 수업이 시작하고 나서도 긴장은 쉽게 풀리지 않았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내 머릿속에서는 방금 내가 저지른 오답이 끊임없이 반복재생되었다. 나는 굴욕감을 느꼈고, 누구를 향해야 할지 모를 분노로 치를 떨었다. 정상이 아니었다.
- 이건 정상이 아냐.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어.
아플정도로 두근거리던 심장,
차갑게 식어버린 손과 발,
뻣뻣하게 굳어버린 온 몸의 근육,
눈에 보일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던 마우스 위의 손,
.... 나는 생각했다. 내가, 집착하고 있구나. 성적에. 그러자 헛웃음이 났다. 이 나이에, 학점 따위, 성적 따위,게다가 이런 약식시험 따위, 길고 복잡한 인생 속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동안 누차 깨달아오지 않았던가.
- 그것으로 무엇을 증명하려는 거야, 너는?
화살이 꿰뚫는 그곳,
이야기를 쓸 때, 캐릭터에겐 약점 또는 결함이 필요하다. (그 약점을 '하마르티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약점으로 인해 위기가 생겨난다. 성스러운 물이 영웅의 온몸에 보이지 않는 갑옷을 만들어주더라도, 어린 아이였던 영웅을 물에 담근 자가 잡고 있었던 발 뒤꿈치, 그래서 영웅의 몸 중 유일하게 화살이 꿰뚫을 수 있는 그 자리가 그의 약점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우리만의 발뒤꿈치를 갖고 있다. 화살이 꿰뚫는 곳, 치명적인 급소, 쉽게 상처받고 쉽게 피흘리는 곳. 대개는 여러개의 발뒤꿈치를 갖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영웅도 아니니까.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당신의 약점입니다.
일년간 드라마 작법 수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캐릭터'에 관한 설명을 할 때마다 나는 강조했다.
주인공에게는 결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결함은 주인공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죠. 그래서 아이나 연인을 잃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많죠.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아이를, 연인을 사랑하니까요. 할머니가 세상의 전부인 캐릭터가 있다면, 할머니에게 위험이 닥치면서 이야기를 시작해야죠. 그래야 캐릭터가 움직일 강력한 동인이 생기니까요. 돈을 사랑하는 캐릭터의 약점은 돈입니다. 부를 상실하는 (위험에 처하는) 것이 그 캐릭터를 가장 개연성있게, 강력하게 움직일 수 만드는 방법입니다. 플롯에 힘이 실리죠. 명예를 사랑하는 캐릭터의 약점은 명예입니다. 명예가 추락했을 때, 그 캐릭터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 바로 내가 했던 말들이다.
나는 공부를, 지식을, 지성을 사랑한다. 대체로 그러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지금도 휴일 오전 느긋하게 침대에 기대 앉아 커피를 마시며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는 일이 최고의 휴식이다. 반지성주의를 혐오하고, '무식하고 용감한' 타입을 싫어한다.
그리고 나는 깨닫게 된 것이다. 약식시험 앞에 굳어버리는 나를 보며. 그 뒤에 욕심, 욕망, 집착, 분노...를 보며.그리고 오만함. 나는 공부를 하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싶었던 걸까? 내가 추구하는 지성이 다른 욕구보다 고차원적인 거라고, 그러므로 나는 더 나은 인간이라고?
마우스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떨리던 내 손은, 어느 새, 어쩌면 나의 '공부'가 나를 성장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내가 집착하는 그 무엇이 되어버렸음을 보여주었다.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렸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나는 공부를 나의 자아와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험을 못보면 학점이 나쁘면 그것이 곧바로 내 자아를 흔들어버리는.... 가장 사랑하는 것이 나를 무너뜨리는 아이러니.
지금 날아온 화살이 꿰뚫는 나는 어디일까.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되었다.
연말에 급작스럽게 이사를 하게 되었다. 예기치 못한 이사인데다가, 현재 있는 곳보다 좁은 평수로 옮기게 되어 짐을 줄이기 시작하는 중이다. 이 기회에, 불필요하게 끌어안고 있던 것들을 다 버리고, 좀 더 소박하게 살아봐야지 하고 있다. 원래도 물건을 쌓아두는 편이 아니고, 또 나름 그때그때 버리고 정리하면서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책장을 정리하면서 새삼 놀랐다. 옷이나 가구 등은 대체로 별 문제가 없는데, 책만, 오로지 책만 문제였다. 이십년도 더 된 책, 있었는지도 모를 책, 다시는 읽지 않을 책들을 뭐 이렇게 다 안고 살았는지도 놀라웠지만, 대학 때 들은 강의자료까지 차곡차곡 알뜰하게도 다 정리해놓은 것도 놀라웠다. 정말 그 종이뭉치들을 다시 펼쳐볼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 안에 들어있는 지식이 언젠가 유용하게 다시 필요해지리라고 믿었던 걸까.
파일에 끼워놓은 그 자료들을 하나하나씩 스테이플러를 빼내 재활용쓰레기에 버리고 있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고, 스테이플러 빼기도 힘들고, 그리고 너무 많은 필요없는 것들을 안고 살았다 싶다. 그러면서도 또한 놀라운 것은, 여전히, 책을 버리는 데에 상당한 저항감이 든다는 사실. 아직 버릴 책을 다 골라내지도 못했는데도. 마치 이 책을 버리면 이 책과 함께 내 안에 있는 중요한 무언가-어쩌면 내 지성(이라 믿었던 것)의 일부?-가 같이 버려지는 것 같은 두려움이 든다.
이야기의 끝으로,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약점이다, 라고 썼지만,
그리고 그 말은 꽤 진실이지만,
주인공이 이야기의 끝에서 깨닫는 것은, 거의 언제나 '진실한 사랑'이다.
('진짜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들었던, 주인공의 사랑은 미성숙하거나 왜곡되었거나 잘못 알고 있었거나... 그래서 이야기의 시작과 중간을 지나 끝에 다다르며 '변화'한 캐릭터는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그 얄팍하고 뒤틀렸던 것은,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은, 사랑이 아니었구나, 하고.
어쩌면 그래서 나도 생각한다. 아, 공부에 대한, 지성에 대한, 책에 대한 나의 사랑은,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구나 하고. 그것은 집착이고, 허약한 인정욕구이고, 들키고 싶지 않은 우월감이었구나 하고. 그러니 어쩌면, 어쩌면 말이야, 내 사랑은 이제부터 시작이려나. 책장을 다 정리할 때쯤 나의 지성이 조금 더 진실에 가까워져있기를. 진짜로 공부하는 인간이 될 수 있기를. 더 좁아도 더 여유로워진 공간으로 옮겨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