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PD의 드라마 글쓰기 (3)
오해없으시길 바란다. '나'의 글쓰기에 크게 도움이 되었던 책 몇 권을 소개한다. 누구에게나 효과가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다만, 나는 이 책들을 모두 여러번 읽었고, 그때마다 필요한 정보나 영감을 받았다. 대개는 많은 이들에게 그러했을 것이다. 글쓰기를 책으로 배울 수는 없지만, 그러나 다른 이들이 쓴 것을 통해 나의 쓰기를 배울 수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러번 언급했다시피, 잘 쓰고 싶다면,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 그 이외의 길은 없다. 많이 읽고 많이 쓰지 않으면서 '오래' '지속적으로' 글을 잘 쓰겠다는 것은 게으름이고 위선이다.
자, 그럼 이 거칠고 지난한 글쓰기의 세계에서,
특히 극한의 기쁨과 슬픔이 함께 하는 픽션 창작의 세계에서,
나에게 동앗줄을 내려주었던 몇권의 책을 소개한다. (슬프게도)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그 동앗줄을 붙잡고 위기의 순간으로부터 빠져나와 (다행스럽게도) 여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번호는 현재 내 책상 위에 책이 쌓여있는 순서와 동일하다.
1.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 (크리스토퍼 보글러 지음, 함춘성 옮김 / 비즈앤비즈)
영웅의 여행-이라는 컨셉으로 이야기쓰기를 설명한다. 사례분석은 큰 임팩트는 없고, 제 2부 <여행의 과정>은 매우 유용하다. 나는 대충 초고를 써놓고 or 스토리라인을 잡아놓고 이 틀에 맞춰 구성을 정교화하는 데 이 책을 자주 썼다. 내가 아는 어떤 영화사 대표님은 시나리오를 검토할 때 항상 이 책을 참고한다고 하셨다. 아마 나와 비슷한 용도가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7.동굴 가장 깊은 곳으로의 접근 -> 8.시련 -> 9.보상 -> 10.귀환의 길 -> 11.부활 -> 12.영약을 가지고 귀환 -- 이 부분을 반복해서 보면서, 이야기를 절정으로 치닫게 하고 엔딩에 가까워지는 호흡을 조절하고, '클라이맥스'를 어떤 식으로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가볍게 읽을만한 책은 아니다. 읽을 때마다 새롭다.
2. 헐리우드에서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들의 101가지 습관 (칼 이글레시아스 지음, 이정복 옮김 / 경당)
출판당시 유행이었는지 자기계발서같은 제목이 붙었지만, 의외로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책. 말 그대로 성공한 작가들의 글쓰기 습관을 다루고 있지만, 글을 쓸 때 우리가 부딪히게 되는 어떤 이슈들과 관련되어 잘 구성되어 있다. 기획과 편집이 상당히 좋은 책이다.
여튼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흔히 가지는 헐리우드의 화려한 이미지와 달리, 대부분의 작가들이 수도승처럼(?) 절제된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체력관리에 힘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글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쓴다고 하는데, 이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실인 듯 싶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스트레칭을 하고 작은 작업실의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작가들의 모습이 눈에 보일 듯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나의 경우에는, 경건하게 어서 글을 쓰고 싶어지는 효과가 있기도 했다.
3.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로버트 맥기 지음, 고영범,이승민 옮김 / 황금가지)
원제 STORY. 설명이 필요없는 스토리텔링의 바이블.
이야기 쓰기에 필요한 모든 개념이 총망라되어 있어서 기초를 잡기에 매우 좋다. 책의 두께에 위압감을 느낄 수 있지만, 상당히 읽기 쉽게 쓰여있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너무 재미있어서 책을 다 읽어가는 게 아깝다고 느꼈던 기억이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두어번 정도 통독하고 난 뒤, 사전처럼 필요한 부분만 그때그때 찾아서 보는 게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두어번 정도 통독을 해야 하는 이유는 '스토리'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을 짚고 기본개념을 숙달해야 할 뿐 아니라, 통독을 해야만 어떤 내용이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있어서 나중에 사전처럼 활용하기가 편리해지기 때문이다.
4. 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1, 2 (조엘 디케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두권짜리 소설이다. 왜 이 소설이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지 생뚱맞아 보일 수 있겠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좀 충격-사실은 강렬한 질투심-을 받았는데, 그것은... 어떤 젊은 작가의 초기작이 너무나 완벽한 '스토리텔링'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소설이라 내용을 스포할 수는 없지만, 매우 재미있고 (나는 이 책을 여러명의 지인에게 추천했는데, 모두가 극찬한 바 있다), 특히 2권에서 몰아치는 이야기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는 법, 반전을 주는 방식, 캐릭터를 구축하는 방식 등에 대해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고, 무엇보다도 이야기에서 "씨뿌리고 거둬들이기"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 나는 지금도 이야기의 구성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다 싶으면 이 소설을 읽는다. 여전히 놀랍고, 이야기가 얼마나 멋진 것인가 뭉클하고, 그리고 나도 좋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5.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우선 스티븐 킹이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를 느낄 수 있다. 그는 글쓰기에 관한 에세이를 쓸 때조차도 스릴러 소설의 문법을 사용하는 것 같다. 생생하게, 그리고 다음이 너무 궁금해지게 쓴다. 스티븐 킹의 글쓰기를 나자신에 게 직접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나만의 글쓰기를 위한 참고자료로서는 그 가치가 충분하다. 스티븐 킹이 작법강의, 작법책을 무시하는 것은 재미있는 부분. 그는 이야기 자체가 가진 힘을 믿는데, 이 경우 그 자체에 충분한 가능성을 가진 착상이 무척 중요해지는 것 같다. 즉 애초에 '깜이 되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 (한국의 이창동 감독님도 비슷한 견해를 갖고 계신 듯.)
사족. 혹시 영어공부 중이신 분이 계시다면, 번역본 말고 원서 <On Writing>로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한다. 스티븐 킹이 얼마나 글을 재미있게 쓰는지를 영어로 읽으면 더욱 실감할 수 있다.
6. 스토리텔링의 비밀 (마이클 티어노 지음, 김윤철 옮김 / 아우라)
가볍게 이야기쓰기의 기초를 잡기에 좋은 책.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비추어 스토리텔링을 설명해준다. 길지 않아서 부담은 없지만, 상당히 깔끔하게 기본적인 개념을 잡도록 도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