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PD의 멘탈관리법
요즘 부쩍 주변사람들의 사정을 들을 일이 많았다. 디테일은 모두 다양했지만, 다들 이구동성으로 '힘들다'고 한다. 그중 대부분은 정말 특수하고 엄청난 불행/고통이라기보다는, 살면서 누구나 지나가야 하는 괴로운 상황들- 그래서 지나고 나면 어? 그랬었나? 싶게 희미해져버리는 그런 종류의 사정들이다.
물론 나도 그렇다. 나도 요즘 힘들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힘들기 시작한지 꽤 된 것도 같다. 그런데 얼마전 누군가 토로하는 괴로움을 듣던 중 '네가 얼마나 힘들지 알 것도 같다'고 나름의 위로를 표현했는데, 곧바로 '너는 몰라, 너처럼 편안하게 사는 인간이 나의 불행을 이해할 리가 없어'라는 답이 날아왔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혹은 그동안의 수양의 결과인지(이쪽이길 바라지만, 아무튼) 전혀 화가 나지 않았고, 아, 그래, 누군가가 보기에는 내가 배 두들기며 유유자적하는 삶일 수 있지, 하는 자기성찰이 들었다. 사실 그렇게 말한 누군가의 삶도 또 다른 불행한 누군가가 보기에는 참 너는 인생을 날로 먹는구나 싶어지는 부러운 인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연약한 인간은 -객관적인 사실들과는 무관하게- 나 이외의 모든 타인은 평화롭고, 오직 나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는 절망의 나락으로 순식간에 떨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바닥에서 아주 오랫동안 지내야 할 수도 있다. 그러기 전에 수시로 스트레스 점검하고 멘탈 관리하면서, 어차피 태어났고 살아야 하는 삶인데, 기왕이면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불행한 인간으로 스스로를 규정하지는 말자.... 생각해보면 내 주변의 멋있는 사람들, 언제라도 만나고 싶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은 꾸준히 멘탈관리를 나름의 방식대로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적어본다. 내가 쓰는 가장 유용하고 효과적인 멘탈관리비법 두 가지. 사실 모두 알고 계시겠지만, 한번 더 상기하는 것도 작게나마 힘이 될 수 있으니까.
자, 그럼 모두들 힘을 내시길. 저도 이제 그만 힘들도록 하겠습니다. :)
1. 일단 잡시다, 여러분
일단 자야한다.
여기에는 더 말이 필요없다. 충분한 수면. 회복을 위해 이보다 더 도움되는 일이 있을까.
드라마PD의 일이라는 게 워낙 불규칙하다보니, 밤은 샐만큼 새봤다. 일주일(하루 아님)에 9시간을 자면서 일했던 적도 있다. 물론 그때 나는 혈기왕성한 이십대였고, 드라마촬영현장은 지금보다 더 거칠고 미개했다. 젊었고, 다 그런 것이려니 했으니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오열)
각설하고.
잠이 부족할 때는 잠이 부족하다는 걸 잘 못 느낀다. 먹고 싸고 걸어다니고 일도 그럭저럭 해나가니까. 좀 피곤하고 좀 졸리긴 하지만, 나의 짜증이, 나의 미숙함이, 나의 분노가 '부족한 수면'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짜증날 만한 상황이니까, 어려운 일이니까, 일이 빡세니까... 그래서 그런 거라고 믿는다. 설마... 이게 잠이 부족해서라고?
이 모든 것이, 100%는 아니지만 놀랄만큼 많은 비중으로, '잠을 충분히 못자서'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피 속에 흐르는 마지막 에너지 한 톨까지 끌어올려 사용하면서 아드레날린을 뿜어대며 뛰어다녔던 바로 그 일이 끝나고, 긴 잠을 자고 나서 일어난 후이다. 눈을 뜨니 세상은 아름답고 몸은 편안하고 내 마음은... 어머나, 내 마음아, 이렇게 온순했었니? 비로소 나는 더 많이 잤더라면, 지난 시간 속의 내가 더 유능하고 따뜻한 인간일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만큼 나는 충분히 내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더 뾰족하고 까칠했었다는 걸... (빌 클린턴이 자신이 내린 최악의 결정은 피곤할 때 내린 결정이다... 고 말했던 건 이런 맥락이었겠죠.)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잠자는 시간은 절대로 줄이지 않는다. 내가 하루 여덟시간은 꼬박 자야만 하는 인간이라는 것도 다년간의 탐구생활을 통해, 이제는 알고 있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한두시간 수면을 줄여야 한다면, 그 사정이 끝난 뒤에 반드시 잠을 보충한다. 잠을 많이 자면, 일의 능률은 반드시 올라간다. 졸린 눈을 비비며 두시간이 걸려야 하는 일이라면, 푹 자고 맑은 정신으로 한시간만에 끝낼 수 있다. (진짜다. 다들 시험해 보시라.)
2. 기억하자, 나는 우주의 티끌같은 먼지 한톨...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비대한 에고ego'는 스트레스의 가장 큰 적이다. 역으로, 내가 대단치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은 스트레스 지수를 낮추는 데 언제나 도움이 된다.
자신의 에고가 과도하게 비대하다고 생각해보신 적 있는지?
'아닌데? 나는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해본 적 없는데?' 이렇게 대답하실 분이 많으시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자신을 실제보다 '크게' 의식하고 살아간다. 한번 따져보자.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사람들이 실망하겠지?'- No.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의 행동에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쉬면 회사업무에 지장이 생기잖아.'- No. 우리가 충분한 휴식을 취해도 회사는 잘 돌아갑니다.
'지난 번 그 일에 대해 사람들이 내 흉을 보고 있을 거야.' - No. 사람들은 이미 지난 그 일을 잊었습니다.
나는 내가 꽤 합리적이라 생각해왔기 때문에, 내 자아의 크기는 매우 적절하리라 믿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비대한 자아의 소유자였고, 그것이 나의 많은 괴로움의 근원이었다.
긴 휴가를 다녀와서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당연하게도 너무나 무사한 회사를 보니 서운했다. 내가 뭐라고, 이 큰 회사가 나 없이 휘청할 거라 느꼈던 걸까? 내가 연출한 드라마가 방송된 다음날 아침, 세상이 너무나 평소처럼 고요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나는 내가 연출한 드라마가 세상을 뒤엎을 줄 알았던 걸까? 회사에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사표를 던진 후배의 자리는 일주일도 안 되어 다른 사람으로 채워졌다. 어? 누구? 아... 우리 사무실에 그런 사람이 있었나? 내가 치욕이라고 느꼈던 장면을 주도했던 선배가 어느날 다가와 엄청 친한 사이인 것처럼 굴었다. 그에게는 그 장면이 어떤 무게감도 갖지 않고 잊혀졌다. 세상에, 그럼 나는 왜 분노와 굴욕감에 그 오랜시간 치를 떨었던 것일까?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내가 하는 일이 대단치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완전하지 않다. 나의 에고는 틈만 나면 부풀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럴 기미가 보이면, 나는 중얼거린다. 나는 그냥 우주의 먼지 한톨... 그러니 아무려면 어때. 다 지나가고 사라질 일이야. 그러면 치솟던 긴장감이 수그러들기 시작하고 그냥 편안히, 나의 페이스에 맞춰 내가 하고자 했던 그것을 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모두 독특하고 소중한 존엄한 존재라는 것, 동시에 인간은 모두 결국에는 사라질 우주의 먼지 한톨에 불과하다는 것. 이 두가지는 모두 진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저 '나의 기준'에 맞춰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결과는 내 몫이 아니다. 그 결과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대단치 않다. 그리고 겸손과 감사는 '대단치 않음'에 대한 인식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선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