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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는 찬란하다

by 제이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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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드신 어머니는 올 초에 무릎 관절 수술을 받으셨다. 다시 걸을 수 없을 거라는 염려와 걱정을 뒤로 하고, 지금은 많이 회복하여 조금씩이라도 걸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집 주변 올레길을 걸으며 마을 경로당도 오갈 수 있다고 하니, 참 감사할 따름이다. 지난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막내딸과 함께 찾은 고향 제주에서 동네 올래길을 걷는 어머니와 막내딸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걷기, 매일 매일 하는 일상이다. 출근길에, 지인 방문 길에, 시장 가는 길에, 심부름 가는 길에 늘 어김없이 걸어야 하니까. 당연히 하는 일이니 ‘걷기’ 또한 특별한 일 없는 일상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걸으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을 정리하다 보면, 마음이 정화되는 순간이 있다.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몸도 회복된다. 어떤 경우에는 아무 생각없이 걷기도 한다. 생각을 뒤로 하고 그저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두며 걸을 뿐이다. 그런 아무생각없이 걷기도 끝나고 나면 상쾌함이 느껴진다.


『빨강머리 앤』에서 앤과 다이아나의 산책을 떠올려 볼까? 그들의 우정의 산책 말이다. 앤과 다이아나가 자작나무 숲을 걸으면서 하늘을 보고 바람을 느끼면서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잊을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 숲에서 산책하면서 나누었던 요정과 난장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한 소꿉놀이 이상의 창의적인 상상력이자, 회복의 시간이다. 누구든지 그런 시간을 꿈꿀 수 있고, 꿈꾸게 만들고 있으니 그들의 산책 장면을 읽거나 보기만 해도 무디었던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고 촉촉해진다.


제인 오스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산책 장면과 산책에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독자들의 관심을 끈다, 그녀의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산책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걷기도 하고, 아픈 언니를 만나기 위해 진흙길을 열심히 걷기도 한다. 또는 누군가의 심부름을 전하기 위해 걷기도 하고, 또 아픈 몸을 회복하기 위해 바람을 쐬기 위해 걷기도 하며, 비밀 이야기를 하기 위해 걷기도 한다.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는 아픈 언니를 만나기 위해 옷이 더렵혀지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비에 젖은 길을 3마일이나 걸었다. 이를 보고 캐서린 부인이 엘리자베스 흉을 볼 때 애독자로서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프던지.


엘리자베스의 씩씩한 걸음도 좋지만, 『이성과 감성』의 메리앤의 회복적 걷기 또한 좋다. 이 소설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남편의 죽음으로 대시우드 부인은 두 딸과 함께 데번셔 코티지로 이사하게 된다. 사랑했던 인간말종 바람둥이 윌로비의 결혼으로 상심한 메리안은 슬픈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고, 클리블랜드의 파머씨 댁에 초대받아 엘리너와 메리언은 클리브랜드로 향하게 되는데, 메리언은 그곳의 장원 숲을 돌아다니다가 감기에 걸리게 된다. 조금 회복되자 다시 코티지 집으로 돌아오고 집 주변의 언덕을 산책하면서 서서히 회복해 간다. 이 산책은 메리언의 몸과 마음이 회복됐음을 알리는 산책이었다.


메리앤이 자기 같은 환자도 한번 나가 볼까 할 만큼 날씨가 풀리기까지는, 집에서 이삼 일은 더 지내야 했다. 마침내 부드럽고 온화한 아침이 왔다. 딸도 원할 만하고 또 어머니가 나가도 좋겠다고 판단할 만한 날이었다. 메리앤은 엘리너의 팔에 기대어 피곤하지만 않으면 집 앞의 작은 길로 갈 수 있는데까지 걸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메리앤이 앓고 난 후 지금까지 한번도 해보지 않던 운동이라 자매는 메리앤의 몸 상태에 맞추어 느린 보조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집을 벗어나 집 뒤의 그 언덕다운 언덕이 다 보이는 곳까지밖에 가지 않았는데, 메리앤이 발을 멈추고 그 언덕을 향해 눈길을 돌리면서 조용히 말했다.

“저기, 바로 저기야.” 한 손으로 가리키면서, “저기 튀어나온 둔덕에서...... 저기서 넘어졌지. 그리고 저기서 처음 윌로비를 보았어.”

윌로비라는 말과 더불어 목소리가 가라앉았지만, 바로 회복을 하고서 덧붙였다.

“저 장소를 봐도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어서 고마워!”


이야기 한김에 제인 오스틴의 다른 소설, 『노쌩거 사원』도 한번 들여다 보자. 『노쌩거 사원』에서 여주인공 캐서린은 헨리 틸리 남매와 산책을 약속하지만 존 남매의 방해로 산책을 못하게 됐다가 나중에 드디어 산책을 하게 된다. 이 산책을 계기로 틸리 남매에 대한 캐서린의 애정은 더욱 커진다. 산책은 캐서린에게 약속과 희망의 걷기와 같다. 그리고 산책을 대하는 헨리 틸리와 존 소프의 자세에서 두 인물의 차이점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산책을 무의미한 시간이라고 경시하면서 약속을 깨트리게 만드는 존 소프에 비해 헨리 틸리는 산책을깊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으로 여기고 캐서린에게 진심을 보여준다.


자연을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걷기와 산책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에게 걷기는 내면화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맨스필드 파크』에서 자연을 매우 사랑하는 패니는 자연의 산물을 잘 관찰하기 위해서 산책을 주로 하며, 산책을 통해 목도하는 장면들을 마음 속 깊이 저장해 두기도 하고 이를 통해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도 키워간다. 이런 산책은 무리와 떨어져서 혼자여도 괜찮다. 소풍처럼 가게 된 저택 방문 산책에서 뿔뿔이 흩어지는 인물들 속에서 패니가 혼자 덩그러니 남아서 걷게 된 경우처럼 말이다.


상록수!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반갑고 얼마나 논라운 존재인지 모르겠어요! 자연의 산물이라도 그것에 눈길을 고정하기만 한다면, 누구든 상상의 나래를 펼칠 소재를 발견하지 않을 수 없을 거에요. (126쪽 민음사)


1801년 5월 21일 제인 오스틴이 언니 카산드라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녀가 얼마나 산책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The friendship between Mrs. Chamberlayne and me which you predicted has already taken place, for we shake hands whenever we meet. Our grand walk to Weston was again fixed for yesterday, and was accomplished in a very striking manner. Every one of the party declined it under some pretence or other except our two selves, and we had therefore a tête-à-tête...

It would have amused you to see our progress. We went up by Sion Hill, and returned across the fields. In climbing a hill Mrs. Chamberlayne is very capital; I could with difficulty keep pace with her, yet would not flinch for the world. On plain ground I was quite her equal.

“언니가 예상했던 대로 체임벌린 부인과 나 사이에 우정이 피어났고 이제 우리는 만날 때마다 악수를 건네. 어제 우리는 다시 웨스턴을 제대로 돌아봤고 아주 꼼꼼히 살폈어. 우리 두 사람 빼곤 모두 핑계를 대며 거절했기에 둘 만의 사담을 나누었고 그러는 통에 바스의 첫2야드를 동네 사람들과 같이 걸었지 뭐야.

우리가 어디까지 갔는지 알면 언니는 놀랄거야. 시온 힐까지 갔고 들판을 가로질러 돌아왔어. 체임벌린 부인은 언덕을 오르는데 선수야. 그녀를 따라잡는라 난 힘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어. 평지에서는 나도 그녀 못지않게 걸었어.”(제인 오스틴, 19세기 영국에서 보낸 편지, 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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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요즘, 점차 걷기가 좋아지고 있다. 제인 오스틴 여주인공들처럼, 그리고 빨강머리 앤처럼, 산책을 사랑하기로 했다. 설령 긴 치마를 입었는데 옷에 진흙이 튀더라도 말이다. 걷기는 찬란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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