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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by 제이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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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반스케치를 시작하면서 아이들 뒷모습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요구하기도 했고, 앞모습 보여주는 것을 아직은 낯설고 부끄러워 한다. 위 그림은 아마도 2015년에 찍은 사진을 그린 것이다. 토요일 성당 어린이 미사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오후라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고, 저녁에는 뭘 먹을까?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가는 길이었다. 이렇게 기억이 또렷한 것은 그날의 일을 수첩에 메모했었기 때문이다. 세 남매의 친근함, 서로에 대한 격려와 보살핌을 느낄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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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아이들도 훌쩍 자랐다. 2021년도 서울대공원 나들이를 갔다가 걸어가는 세 아이의 뒷모습을 찍어 보았다. 그 때 찍은 사진을 앞에 두고 스케치를 해 보았다. 2015년도와 다르게 아이들 배치가 달라졌고, 걸음걸이도 훨씬 활기차고 씩씩해 보인다. 자그맣던 막내도 많이 자라서 언니 키를 따라잡고 있다. 이제 이 아이들은 각자의 독립적 삶을 향해 씩씩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들의 뒷모습에는 각자의 꿈에 대한 표출, 그리고 서로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다.


어느 때부터인가 뒷모습을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다. 뒷모습은 앞모습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뒷모습이 더 솔직해 보인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여운이 많고, 더 풍부한 상상을 하게 해주고, 희망을 품게 해준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은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


뒷모습은 정작 주인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타인만이 볼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바라보는 타인과의 관계에도 이야기가 파생된다. 미셀 투르니에의 『뒷모습』에서 서로 허리를 감싸고 걸어가는 두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 두 아이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진다. 서로를 향해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둘만의 비밀이야기를 하면서 걸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이 두 아이를 지켜보고 있다면 질투의 감정도 느낄 것이다. 미셀 투르니에는 이 사진에 “우정‘이라 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정에는 비밀과 배타적 결속이 있다. 우정은 이 사진에서처럼 타인에게 등을 돌리는 방식에 의해서 그 본질을 가장 뚜렷이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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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의 주인, 즉 당사자들의 뒷모습을 통해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상상해 볼 수 있지만,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타인과의 관계의 의미도 만들어낸다. 미셀 투르니에가 위 두 아이를 보면서 ”우정에는 비밀과 배타적 결속이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배타적 결속이라는 말에서 나는 이 두 아이를 바라보는 제 삼자의 아이를 떠올려 보게 된다. 그들을 부러워하면서 바라보았을, 그리고 외로움을 느꼈을 그 아이의 마음 말이다. 내가 우리 세 아이들 뒷모습을 그렸을 때, 세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그들만의 관계를 말한 것만은 아니다. 엄마로서 그들을 바라보는 마음과 기도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다음 그림을 한번 살펴보자.

image02.png 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슈바인, 창가의 괴테, 1787년, 종이에 연필과 펜, 수채, 41.5×26.6㎝, 프랑크푸르트 괴테 박물관 소장.


티슈바인은 편안한 옷차림에 실내화를 신고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바깥을 쳐다보는 괴테의 모습을 그렸다. 이때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 중이었고, 친구 티슈바인의 아파트에 숙박하고 있었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은 이때의 여행을 담은 글이다. 그림에서 보이는 쾨테의 뒷모습 자태와 그의 복장은 여행이 매우 편안하고 자유로운 여행임을 짐작하게 해 준다. 또한 그의 뒷모습을 보면 저 창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아름다운 소녀가 지나가고 있었을까. 아니면 거리에서 상인들의 흥정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아니면 늙은 노부부의 오붓한 산책 풍경이 있었을까. 창 밖으로 맞은편 집의 지붕이 잠시 보이는데, 건너편에 살고 있는 아리따운 여인을 유심히 보고 있었던 것일까. 여러가지 상상이 머리 속을 맴돈다. 이런 상상은 매우 즐겁다.


알랭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에 쓰인 한 구절을 보면, 쾨테의 이탈리아 남부의 여행이 갖는 의미를 자세히 알 수 있다. 자유로운 여행의 경험은 잘 간직되어서 예술로 전달되야 한다는 것 말이다.


괴테, 니체, 코널리 같은 사람들에게 남부는 행복이었다. 하지만 장기 체류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문제는 남부 지방에서 찾은 충족감을 일부라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데 있다. 북부로 돌아왔을 때 남부의 가치들을 어떻게 내 것으로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그 답은 이책에서 자주 언급했듯이 경험을 간직하고 전달하는 최고의 수단, 바로 예술에 있다.

괴테의 뒷모습, 남부 이탈리아 여행, 자유로운 여행, 그리고 예술을 접목시킨 알랭드 보통의 시각은 매우 인상적이다. 빌헬름 함메르쇼의 뒷모습 그림도 인상적이다.


image03.png 빌헬름 함메르쇼이 ‘젊은 여인의 뒷모습과 실내’(1904), 사진 덴마크 란데르스 미술관

그림을 한번 살펴보자. 쟁반을 들고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한 여인의 모습이다. 우아한 뒤 목선과 차분한 자태가 돋보이는 그림이다. 차분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비단 여인의 뒷모습뿐만이 아니다. 테이블 위 도자기의 정갈함, 푸른 회색 빛의 벽 색깔이 여인의 뒷모습의 차분함을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일까. 여인의 옆을 비추는 햇살이 유독 따뜻해 보인다. 이 여인이 살고 있는 집의 풍경이 상상된다. 분명 모든 것이 정갈하게 자리잡혀 있을 것이고, 집에 장식된 그릇 하나에도 절제미가 있을 것 같다. 그녀가 머무는 집은 이리 따뜻할 것이니, 그림을 보는 이로 하여금 집을 살펴보게 만들 것이다. 내가 머무는 집은 따뜻한가?


함메르쇼가 활동하던 시기 1890년대 유럽은 인상주의가 휩쓸고 있었다. 덴마크는 해가 짧은 북유럽 특유의 기후로 실내를 묘사하는 그림 장르가 유행했다고 한다. 고요한 실내 풍경, 집에서 지내는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그린 그림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집 안에서의 일상을 그리다보니, 자연스레 사람들의 뒷모습에 눈길이 가지 않았을까 한다. 뒷모습에서 일상을 사색하게 만드니 일상의 그림들도 차츰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뒷모습 그림을 그리던 시기에 나는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있었다. 그것까지 합치면 지금까지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었다. 이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친구가 될 수 있나보다.(하루키가 쓴 『상실의 시대』에서 도쿄대 법대생 나가사와는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은 그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읽은 뒤 여운이 매우 강하게 남는 책이라 한동안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왜 작가는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말했을까. 개츠비 저택 옆에 살던 닉 캐러웨이는 개츠비의 뒷모습을 수없이 보았을 것이다. 화려한 저택에서 매일매일 파티를 여는 개츠비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 여인(데이지)을 사랑하다 결국은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개츠비의 어떤 점이 위대했을까. 저멀리 보이는 데이지의 집, 초록색 불빛을 바라보며 삶과 사랑에 대한 희망을 꿈꾸고 그것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위대함 그 자체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닉 캐러웨이가 바라본 개츠비의 뒷모습은 충분히 그런 위대함을 풍기고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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