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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이 필요한 이유

by 제이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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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반스케치 활동에서 고궁의 담벼락을 그려봤다. 담벼락의 돌을 그리는 일은 마치 돌을 쌓아 담장을 쌓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무념 무상으로 담장을 그리다 보니, 우리 선조들은 기와집을 지으면서 담장도 참 공들여서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고궁의 담장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 보게 되니, 그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담벼락을 그리는 일, 나에게는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담벼락은 담의 벽이나 표면을 지칭하기도 하고 담장을 통틀어서 말하기도 한다. 담 벽이라는 단어보다 담벼락이나 담장이 더 따뜻한 어감으로 들린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나는 돌담에 더 정겨움을 느끼기도 한다. 담벼락, 담장, 돌담이 정겹게 들렸다면 이와 관련된 좋은 기억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담벼락에 관하여 언짢은 기억들이 있다면 절대 정겨운 느낌으로 들릴 리가 없을 테니까. 고향의 아버지는 거센 바람이나 태풍이 불어서, 이웃 소가 우리를 탈출해서 돌담이 무너지면 어김없이 무너진 돌을 다시 쌓아 올리곤 하셨다. 자연은 거스를 수 없는 일이기에 아버지는 돌담 쌓는 일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면서 일을 하시곤 했다. 어른이 돼서 다시 찾은 고향에서 돌담을 볼 때마다 그 높이에 감탄하곤 한다. 이웃집의 과수원 풍경을 다 가리는 높은 풍경도 아니고, 어린아이들이 쉽게 넘어 다닐 수 있게 낮은 높이도 아니다. 딱 적당한 높이다. 적당하 게 바람을 막아주는 높이, 적당하게 농작물을 보호할 수 있는 높이, 적당하게 다시 담장을 쌓을 수 있는 높이 말이다. 돌담 사이사이에 난 틈을 통해 볼 수 있는 맞은편 풍경 또한 아름답다. 돌담은 풍경의 액자로 기능하기도 하니까. 그 틈으로 송송 불어오는 바람은 왜 이리도 달콤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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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이 걸어가는 고궁의 담장은 참 따뜻하고, 아이들의 익살맞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학교의 담장은 매우 활기차며, 감이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가 심어진 벽돌 담장은 시골의 할머니를 떠올리게 만들며, 장미꽃과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돌담 안 주인은 누굴까 상상하게 한다. 넝쿨 장미와 능소화는 다른 물체에 지지하여 타고 올라가니 그들이 생각하기에 담장이 얼마나 고마울까. 담장은 그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다.

담벼락은 경계를 구분 짓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담벼락은 폐쇄적인 면도 있다. 토지나 건축 등, 소유물을 구분 짓고 사유지를 밝히고자 할 때 사람들은 담장을 쌓거나, 돌을 쌓거나, 벽을 세운다. 사유지를 구분 짓는 담장, 영국의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이 연상될 것이다.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서 일어난 제1차 인클로저 운동에서는 곡물 산업 보다 모직 공업을 위한 양모 생산에 중점을 두어, 경작지를 목장으로 바꾸면서 미개간지나 공동 방목장 등의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기 시작했다. 18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일어난 제2차 인클로저 운동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농산물의 수요가 급증하였고, 이를 위한 울타리 치기가 촉진된 상황을 말한다. 1차 때와 달리 2차에서는 정부가 오히려 이 운동을 더욱 촉진시키기도 했다. 담장을 쌓아 자신의 사유 재산을 명백히 하고자 하는 현상은 농촌이든 도시든 어디에서나 목도된다. 어떤 경우에는 담장의 경계가 잘못되어, 이를 둘러싼 법적 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최근에 지어지는 어떤 아파트들은 담장을 허물어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의 경계를 없애기도 하고, 멋진 조경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하지만, 경계가 없었다고 해서 타인에 대한 배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오히려 배타적인 더 높은 담장이 세워져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사유지를 경계 짓는 담장의 의미에 대해 깊이 고찰한 시인이 있다. 미국 시인 로버트프로스트는 <담장을 고치며(Mending the Wall)>란 시에서 담장의 의미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다.


누군가가 담장을 좋아하지 않는가 보다

그래서 그 아래의 땅이 얼어서 부풀어 오르게 하고

햇볕 속에서 윗부분의 돌들이 무너져 내리게 하고

두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을 만한 틈새를 만들어 놓고

사냥꾼들도 담장을 허무는 일에 한몫을 한다.

그들은 돌 위의 돌들을 모두 치워서 토끼가 숨을 곳을 없애

짖어대는 개들을 즐겁게 해 준다.

그런 곳들은 내가 바로 뒤쫓아 가서 수리를 해 놓곤 하였다.

내가 말하는 틈새란 누구의 소행인지 아무도 본 적이 없고,

들어 본 바도 없지만

봄철의 담장 고칠 때에 가서 보면 거기에 있는 것들이다.

...

그는 자기 부친이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따라서 한다기보다

그 말씀에 담긴 뜻을 좋아하는 듯하다.

그가 다시 말한다. ‘울타리가 좋아야 좋은 이웃이 된다네’



여기서 담장은 소유, 경계의 구분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 시는 담장이 이웃 간의 소통을 가로막았는가, 아니면 소통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는가의 문제를 고찰하게 만든다. 얼핏 보면 화자는 봄철마다 매번 담장을 고쳐야 하니, 담장이 필요할까 의문을 갖는 듯 하지만, 두 번이나 “울타리가 좋아야 좋은 이웃이 된다네”라고 부친의 말을 전하면서 담장의 필요성도 은연중에 내비친다. 담장을 고치기 위해서는 이웃을 만나야 하고, 이웃과 활발하게 소통할 수 있으니 담장은 불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나의 아버지가 고향에서 돌담을 다시 쌓으면서 이웃들에게 농사 이야기, 날씨 이야기, 가족 근황 등을 물었던 것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담장은 쌓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 건축물이다. 쌓는 행위는 인간의 기본 행위이고 때로는 경건한 행위이다. 이는 마치 아이들이 레고를 쌓아 올리는 일, 나무 조각을 쌓아 올리는 일과 다르지 않고, 여행객이 어느 산사 입구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을 쌓아 올리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쌓는 사람들에게 왜 쌓아 올리고 있느냐고 따지거나 다그치는 일은 매우 무의미하고 허무한 말이다. 쌓아 올릴 물건들이 있기 때문에 쌓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쌓아 올리면서 자신의 절실한 마음도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있으니, 이는 태고적부터 있었던 자연스러운 주술적 구도적 행위가 아닐까.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그림, <아르장퇴유의 모네의 정원>이라는 그림을 자세히 보면,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이 눈길을 끌지만, 울타리(또 다른 담장) 밑의 연인들의 모습도 매우 인상적이다. 그림에서 울타리 밑의 연인들의 아름다움은 울타리가 있어서 빛이 난다.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서로에 대한 사랑 고백일까? 아니면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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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어린 시절의 경험을 떠올리며 이렇게 묻고 싶다.


담벼락 밑에서 아이들과 공기놀이를 한 적이 있는가?

담장 아래에서 땅따먹기를 한 적이 있는가?

담장에 기대어 친구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가?

돌담 틈으로 보이는 풍경에 매료된 적이 있는가?

돌담 틈에 피어있는 민들레와 달래를 캐 본 적이 있는가?


담벼락은 삶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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